
독수리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양 한 마리를 낚아채 갔다. 이 모습을 나무 위에 있던 까마귀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멋지다. 나도 한번 해봐야지.’
까마귀는 독수리처럼 발톱을 세우고 양을 향해 날아갔다. 양이 발톱에 걸리자 까마귀는 퍼덕퍼덕 날갯짓을 했다. 그런데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들어 올릴 수 없었다. 까마귀는 사냥감을 조금 더 작은 양으로 바꿨다. 이번에는 양털이 발에 엉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이를 발견한 양치기가 엉킨 양털에서 까마귀를 떼어 새끼 양의 놀잇감으로 주었다. 새끼 양이 아빠 양에게 물었다.
“아빠, 이 새 이름이 뭐예요?”
“응, 자기가 독수리인 줄 아는 어리석은 까마귀란다.”
이솝우화 속 까마귀의 실수는 무엇일까? 독수리 흉내를 낸 것? 맞다. 그러면 까마귀는 왜 독수리 흉내를 냈을까?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해 장점을 발휘할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다.
까마귓과 새는 조류 중 가장 영리하다고 알려져 있다. 훈련을 하지 않고도 문제 해결법을 유추해 낼 줄 안다. 한때 호두를 먹는 까마귀 영상이 화제가 되었다. 한 까마귀가 딱딱한 호두 열매를 횡단보도에 떨어뜨리고 전깃줄에 앉아 지켜보았다. 차량이 호두를 깔고 지나가 껍질이 깨진 뒤에도 움직이지 않다가 보행자 신호가 켜졌을 때 도로로 내려와 알맹이를 먹고 떠났다. 우화 속 까마귀가 독수리를 따라하는 방법이 아닌, 자신의 장점인 지능을 십분 활용했다면 기발한 방법으로 양 사냥에 성공하지 않았을까.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처럼 하지 못하는 걸까’ 같은 생각을 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대신 ‘내가 가진 걸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고민해 보자. 좋든 싫든 겸허하게 스스로를 받아들일 때, 나만의 장점을 인지할 수 있고 나다운 결과물을 창출해 낼 수 있다.
자, 이제 연습해 보자.
무던하지 않고 매사에 너무 예민한 내가 싫다고? 단점으로만 생각하면 그저 걸림돌이 될 뿐이지만 섬세한 기질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면 일을 해내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예민한 성격이었기에 전쟁 속 고뇌를 일기장에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자신을 달랬다. 떨어져 지내는 가족에 대한 걱정뿐만 아니라 불면증, 위장병, 배탈 등 질병에 관한 세세한 부분까지 적었다. 그게 바로 개인의 기록을 넘어 역사의 기록물로 평가받는 난중일기다.
말수가 적은 편이라 누굴 만나도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친구들이 부럽다고? 프랑스 화가 조르주 쇠라 역시 지나칠 정도로 과묵했다. 그림을 그리기 전 먼저 꼼꼼히 메모하고 계획을 세웠고, 잔디 색을 전날과 맞추려 하루 동안 자라난 만큼의 잔디를 깎아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타협 없는 완벽주의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성격이 작용해 그는 세로 2m, 가로 3m 크기의 거대한 캔버스를 무수히 작은 점들로 채우며 점묘법이라는 예술 방식을 만들어낸 선구적인 화가가 되었다.
내 개성을 살려 꾸준히 노력해 나간다면 제2의 누군가가 아닌, 제1의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나만이 나의 글을 쓸 수 있으며, 나만이 나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내가 가진 재료를 잘 활용해 내 삶의 정원을 직접 가꾸는 작은 정원사가 되어보자. 무뚝뚝한 성격은, 정원에서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우직한 나무 역할을 해줄 것이다.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느라 뒤엉킨 머릿속은, 작은 동물들에게 쉼터가 되는 덤불처럼 소외된 이들까지 배려하는 따듯함을 불러올 수 있다. 소소한 재능은 소소한 대로 한편에 심어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꽃밭으로 꾸미면 되는 거다. 나를 받아들이고 지켜 일궈낸 나만의 정원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기대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