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켜라 -감정 편-



수오재(守吾齋). 지킬 수, 나 오, 집 재. ‘나를 지키는 집’이란 뜻이다. 조선 후기 문신인 정약용의 형이 자기 집에 붙인 이름이다. 얼핏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나를 지키지 않는다고 ‘나’라는 존재가 어디로 가기라도 할까? 정약용도 이 이름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다 귀양지에서 혼자 지내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갑자기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고 벌떡 일어나 말했다.

“천하 만물 가운데 지킬 것은 하나도 없지만, 오직 나만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

조선판 유레카인 셈. 어떻게 저 말을 하게 되었는지 정약용의 자문자답을 살펴보자. 그는 밭이나 집은, 지고 달아날 자가 없으니 지킬 필요가 없고, 꽃나무나 과일나무는 뿌리가 깊이 박혔으니 뽑아갈 자가 없고, 옷이나 곡식을 훔쳐간다 해도 한두 개에 지나지 않으며 천하의 모든 옷과 곡식을 없앨 수 없으니 지킬 필요가 없다 했다.

그러면 ‘나’를 지켜야 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는 덧붙였다. ‘나’는 나와 친밀하게 딱 붙어 있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지만 잠시 살피지 않으면 떠나가고 만다고. 세속적 이익과 유혹에 쉽게 흔들리고, 위험과 재앙에 겁을 먹어 ‘나’를 상실할 수 있다는 거다. 심지어 한 번 가면 돌아올 줄 모르니 ‘나’를 잃지 않도록 실과 끈으로 묶고 빗장과 자물쇠로 잠가 굳게 지키라 했다.

10대야말로 ‘수오(守吾)’, 곧 나를 수호(守護)하는 게 필요하다. 상황에 따라 수많은 감정이 폭풍처럼 몰아치기도 하고, 외로움과 불안감이 수시로 파도처럼 덮치기도 하니까. 친구의 말 한마디,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표, 잘 안 풀리는 하루…. 이런 데 지나치게 휩쓸리다 보면 감정의 폭풍우에 난파되어 깊고 컴컴한 바닷속에 침몰한 기분이 들고 말 거다.

어떻게 하면 불안감이나 우울감 등에 자아를 잃지 않고 침착하게 지켜낼 수 있을까. 데일 카네기라는 미국의 작가는, 평안을 가져다주는 정신 자세를 어떻게 기를 수 있는지 조언했다.

카네기는 즐겁게 행동하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감정과 행동의 관계에는 특별한 비밀이 숨어 있다. 감정에 따라 행동이 달리 나오듯, 행동이 바뀌면 감정도 저절로 달라진다. 지금 당장 얼굴의 근육을 총동원해 환한 미소를 짓거나, 어깨를 활짝 펴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노래를 흥얼거려 보자. 유쾌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도 가라앉은 기분이 끌어올려진다. 주체할 수 없을 것 같던 감정을 내 의지와 행동으로 조절할 수 있다니 멋지지 않은가.

선행을 베푸는 것도 도움이 된다. 괜한 일을 걱정하며 우울해하고 이런 내가 다른 이들을 걱정시킬까 봐 또 우울해지는 대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방법을 고민하고 실행에 옮겨보자. 놀랍게도 내가 건넨 행복보다 훨씬 큰 행복과 만족감, 자긍심이 되돌아온다. 작은 선행만으로도 충분히 우울의 늪에서 나를 건져낼 수 있다.

굳이 동서양과 고금을 넘나들지 않더라도, 사실 우리는 이 방법을 진작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수천 년 전에 공개해 주신 행복의 비결과 맞닿아 있으니까.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살전 5장 16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 12장 31절)고 교훈한다. ‘항상’이라는 말처럼 ‘기쁘지 않을 때’도 기뻐하려다 보면 실제 기뻐질 것이고, 주위에 사랑을 나누다 보면 이웃의 행복이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당연하고 뻔한 말 같다고? 그렇다면 이제 정말 그렇게 살아보면 어떨까. 당연하고 뻔하게 그리고 펀(fun)하게. 감정이나 상황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켜나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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