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사랑할 수 없는 존재, 우리 엄마

집은 잠만 자는 곳이 되어버린 K-고3입니다.
외동딸인 제게 엄마는 친구, 때로는 자매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된 후로는 학업에 치여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엄마와의 대화는 용건만 묻고 답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자, 오랜만에 엄마와 제대로 된 대화를 시작해 볼까요?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저는 군산에서 태어난 5남매 중 막내 이현실입니다.

엄마의 학창 시절은 어땠나요?

학교에 있는 듯 없는 듯한 아주 내성적인 학생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면 아무도 믿어주지 않지만요. 하하….

저도 안 믿깁니다. 내성적이었던 엄마의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나요?

‘싸모님’입니다. 어릴 적에는 사모님이 제일 높은(?)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하하, 정말 웃기네요. 그럼 어릴 적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

형제가 많아서 그런지 가족들은 제가 집에 없어도 몰랐어요. 원래 자녀가 많은 부모님들은 정신이 없거든요. 어느 날은 하루 종일 놀고 밤늦게 돌아왔는데 엄마가 “집에 없었어?” 하며 깜짝 놀라신 적도 있답니다.

외동딸인 저로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서운한 적은 없었나요?

부모님이 장에 다녀오시면 언니들 옷만 사오셨어요. “내 옷은?”이라고 물으면 “너는 언니 옷 물려 입으면 된다”고 하셨죠. 제 몸에 맞지 않는 큰 옷을 물려 입으니 옷을 예쁘게 입은 적이 별로 없어서 서운했죠. 그래도 막내라는 이유로 마음껏 놀 수 있게 해주신 점은 부모님께 감사해요.

학창 시절로 돌아간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습니다. 부모님께서 왜 그렇게 “공부해라, 공부해라” 말씀하셨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겠어요. 다시 학생이 된다면 글로벌 시대에 맞춰 영어 공부를 가장 열심히 할 거예요.

지금 학생인 저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시간을 아껴 쓰며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좋겠습니다. 흘러간 세월은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으니까요.

하하,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럼 제가 자랑스러울 때는 언제인가요?

딸의 사춘기가 끝난 거요. 마치 천국에 다다른 듯했습니다. 다시는 사춘기 딸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일은요?

네가 태어났을 때겠지? 가장 인상 깊고 행복했던 날이었어.

(충격) 잠시만요, 제게 사춘기가 왔었다고요?

(정색) 물론입니다. 정확히 중2 때였어요. 그때부터는 제가 알던 딸이 아니었어요. 180도 달라진 딸이 낯설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봤어요. 고1이 되니 다시 예전의 내 딸로 돌아오더라고요. 얼마나 기쁘던지! 생각해 보면 참고 지켜봐 주는 것, 기다려주는 것이 자녀의 사춘기를 극복하는 최고의 방법 같아요.

제가 사춘기였는지 전혀 몰랐어요. 묵묵히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질문입니다. 가장 슬펐던 일은 무엇인가요?

남편이 크게 다쳤을 때입니다. 가장의 아픔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큰 시련이었어요. 남편이 건강을 회복해서 우리 가족 셋이 하하 호호 웃으며 속초로 놀러 갔을 때를 잊을 수 없어요. 가족이 함께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꼈거든요. 우리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제게는 아주 크고 귀하답니다.

저도 오랜만에 떠난 가족여행이라 정말 좋았어요. 차 타고 바다를 보며 달리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잖아요. 혹시 ‘가족’으로 이행시 가능한가요?

가족은
족음(조금)만 사랑할 수 없는 존재다!

오, 그 어려운 걸 해내시다니!
엄마가 생각하기에 저는 엄마를 많이 닮았나요. 아빠를 많이 닮았나요?

당연히 아빠입니다. 성격도, 모습도, 얼굴도 저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배 속에서 탯줄로 이어져 저와 함께한 딸은 지금도 여전히 저와 생명줄로 연결된 관계예요.

마지막으로 저에게 하고 싶은 말 해주세요!

항상 건강하자. 많이 사랑한다, 우리 딸!




모처럼 엄마와 긴 이야기를 하며 엄마에 대해 몰랐던 점, 저에 대해 몰랐던 점―내게 사춘기가 있었다니!―을 알게 되어 정말 뜻깊었습니다. 엄마와 부딪힐 때도 있지만 모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니, 대화의 시간을 자주 가져서 제가 무뚝뚝하고 툴툴대도 속은 아니라는 걸 알려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심층탐구 가족학’을 해보니 참 재밌었습니다. 다음에는 아빠를 잘 설득해서 아빠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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