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下

“너….”
“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어느새 선생님도 오셨다.
“무슨 일이니?”
“선생님, 그게요….”
프리야가 선생님께 상황을 설명했지만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리나, 제니. 교무실로 따라와라.”
몸이 안 움직였다.
“리나, 리나? 휴, 수업 끝나고 다시 보자.”
선생님은 한숨을 크게 쉬더니 제니를 데리고 교실을 나갔다. 프리야가 마른 수건을 가져와 내 자리를 닦았다. 물에 젖어 쭈글쭈글해진 원고도 수건으로 꾹꾹 눌러 물기를 뺐다. 수건은 번진 잉크를 빨아들여 금세 까매졌다.
제니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교무실로 갔을 때는 다행인지 제니가 없었다.
“제니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실수로 물을 엎질렀다고 하는구나. 제니가 너무 울어서 오늘은 그냥 집에 가라고 했다. 내일 오면 직접 사과할 거야. 어렵겠지만 오늘 집에 가서 마음 잘 추스르고 내일 제니랑 잘 이야기해 봐. 에세이는…. 다음에도 기회는 있으니까. 힘내라.”
선생님 앞에서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안 난다.
“누나! 왜 이제 와? 오래 기다렸잖아.”
집 앞에 쭈그려 앉아 있던 아만이 쪼르르 달려와 투덜거렸다. 대꾸하기도 귀찮았다.
“누나? 왜 그래? 아파?”
자전거를 대충 세워놓고 집으로 들어갔다. 밥도 먹기 싫었다. 계속 옆에서 칭얼대는 아만을 큰어머니가 겨우 떼어냈다.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나물 아주머니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아침. 나물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괜히 그리웠다. 아주머니는 예쁘고 공부 잘하는 딸이 공들여 쓴 에세이가 한순간에 사라졌을 때 뭐라고 위로해 줄까?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 가자마자 프리야가 나를 교무실로 데려갔다. 선생님 옆에는 왜소한 아주머니가 있었다. 낯이 익었다. 나물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런데 아주머니 뒤편에 제니가 보인다. 설마?
“리나, 저분이 제니 엄마래.”
프리야가 내 귀에 소곤거렸다. 나물 아주머니가 자랑하던 그 딸이 제니라고? 내가 예상한 모습이랑은 전혀 닮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선생님에게 거듭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아, 마침 왔네요. 얘가 리나예요. 리나, 인사드려라. 제니 어머니시다.”
나는 어정쩡하게 서서 뻣뻣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선생님은 너희들 선에서 잘 해결하길 바랐는데, 제니가 엄마한테 말씀드렸나 봐. 제니 어머님이 너를 만나서 꼭 사과하고 싶다고 직접 찾아오셨어.”
눈물이 가득한 아주머니 눈과 마주친 나는 시선을 피해버렸다. 아주머니가 나의 손을 잡았다. 거칠고 마른 손이었다.
“정말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
“미안하다.”
“괘, 괜찮아요. 그건 연습용이었어요.”
놀라서 나를 쳐다보는 프리야를 무시하고 말했다. 나도 무슨 정신인지 모르겠다.
“따로 적어놓은 게 있어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머니의 사과는 끝나지 않았다. 나는 거듭거듭 괜찮다고 말하며 아주머니를 안심시켰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나에게 20루피를 쥐여주려는 아주머니를 겨우 말리고, 선생님과 제니의 거북한 시선을 피해 서둘러 반으로 돌아왔다.
“미안.”
소리 난 쪽을 봤다. 제니였다.
“쿨룩.”
기침이 나왔다. 정말 어색하기 짝이 없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었어. 네가 쓴 에세이가 궁금해서. 너, 잘 쓰잖아. 그런데 손에 쥐고 있던 물통이 미끄러져서….”
“괜찮다니까. 어차피 대회 나갈 마음도 없었어.”
“그래도 장학금이 걸려 있다고….”
“그런 거 안 받아도 잘 살아왔어. 그리고 상 받는다는 보장도 없잖아. 주(州) 대회도 아니고 전국 대회인걸.”
제니는 손만 꼼지락거렸다.
“그런데 제니, 뭐 하나만 물어보자.”
제니가 큰 눈을 끔뻑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너, 나 싫어하잖아. 이유가 뭐야?”
제니의 큰 눈이 더 커졌다.
딩동댕동.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에 제니는 우물쭈물하다 자기 자리로 갔다. 내가 왜 그런 걸 물었을까.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듯 싫어하는 데도 별 이유는 없을 텐데. 하루 종일 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뭐, 더 나빠질 것도 없는 사이였다. 오히려 서로 다가가지 않는 것이 덜 껄끄러울지도 모르겠다.
집에 가려고 자전거를 뺐다.
“리나!”
제니다.
“이거.”
제니는 종이쪽지를 하나 주고는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친구가 많아? 프리야가 전부인데? 큰아버지 집에 얹혀사는 마음이 어떤지 알아? 그리고 너도 공부 잘하잖아!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넌, 엄마가 있잖아. 네가 잘못하면 대신 잘못을 빌어주는 엄마, 같이 울어주는 엄마가.
자전거를 끌고 걸었다. 먼지 풀풀 날리는 거리를 천천히 바라봤다. 송아지가 엄마 소랑 같이 앉아 있었다.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투둑- 투둑-.
비가 내렸다. 내 얼굴에도 비가 쏟아졌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적응한 줄 알았는데. 비가 멈추지 않았다.
“누나!”
아만이 우산을 들고 뛰어왔다.
“아만, 여기까지 왜 나왔어?”
“비 오는데 누나가 계속 안 오니까. 자, 이거 먹어.”
아만은 내 입에 막대사탕을 쏙 물렸다.
“누나, 낮에 우리 집에 나물 아주머니 왔다 갔다?”
“뭐? 왜?”
너무 놀라서 입에서 사탕이 빠질 뻔했다.
“몰라. 엄마랑 계속 뭐라 이야기하더니 나물 엄청 주고 갔어.”
집에 들어갈 때 엄청 조마조마했다.
“리나, 이제 오니?”
“네? 아, 학교 다녀왔습니다.”
“밥 먹자.”
저녁 내내 큰아버지 큰어머니는 별말이 없었다. 더 불안했다.
“저 먼저 들어가서 쉴게요.”
“리나, 우리랑 이야기 좀 할래?”
이런,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아까 제니 어머님이 찾아오셨더라. 나물 아주머니가 네 친구 엄마인지 몰랐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는지 들었어. 속상할 텐데… 괜찮니?”
“네, 괜찮아요.”
“그 대회에 장학금이 걸려 있다고도 들었다. 저번에 네가 에세이에 싫증이 나서 대회에 참가 안 한다고 했었는데, 혹시 장학금 때문에 다시 참가하기로 한 거니? 리나, 우리는 언제나 너의 선택을 존중한단다.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말이야. 하지만 학비 문제 이런 거는 절대 신경 쓰지 마. 네가 부담 가질 필요 없어.”
“그, 그런 거 아니에요.”
“리나, 아직 우리가 어렵지? 근데 이거 아니? 네가 처음 우리랑 살게 되었을 때, 네 엄마 아빠 일은 너무 가슴 아팠지만 네가 있어 우리는 너무 행복했단다. 자식이 없던 우리에게 너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이었어.”
“아만이 태어나고 나서 네가 더 불편해하는 거 안다. 하지만 아만은 우리 아들이고, 너는… 우리 딸이야.”
다시 비가 내렸다.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나를 꼭 안아줬다.
“고마워요. 아빠… 엄마….”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요새 우리 집은 매일 나물 반찬을 먹고 있다. 또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붙어 다니는 친구가 한 명 더 늘었다.
“리나! 다음 에세이 대회 준비 안 해? 뭐 쓸 거야?”
“글쎄, 네 이야기 좀 잔뜩 써볼까?”
“뭐? 나? 막 두꺼비라고 욕해놓을 거 아니지?”
“풋. 진짜 재밌겠다. 리나, 나는 착하게 써줘.”
“오케이, 프리야.”
누구나 마음속에 아픔 하나쯤은 있다. 누구는 아픔을 꽃으로 감추기도 하지만 누구는 가시로 감춘다. 멀리서 보면 마냥 행복하거나 마냥 꼬인 사람처럼 보일지 모른다. 오해는 거기서 시작된다. 하지만 다가가 보면 서로의 아픔이 보인다. 한 걸음 더 다가가면 서로의 아픔을 안아줄 수 있다. 오해는 그렇게 풀린다.
요즘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가뿐하다. 먼지와 매연, 모래는 여전한데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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