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도 페달을 힘차게 밟고 학교로 향했다. 갑자기 트럭이 귀가 찢어질 듯 경적을 울리며 내 옆을 지나갔다. 까만 매연이 시야를 가렸다.
“쿨룩쿨룩.”
모래가 와그작 씹혔다.
‘윽, 입 벌리고 있었나?’
험난한 등굣길 끝에 학교에 도착했다. 기진맥진해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앞자리에 앉은 샬리니와 레카가 재잘재잘 수다를 떨고 있었다.
“너 그거 아니? 오늘 우리 엄마가 말이야….”
“쉿! 조용해.”
샬리니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레카가 샬리니를 팔꿈치로 툭 치며 눈치를 줬다. 샬리니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나를 흘깃 돌아보는 둘의 눈빛이 몹시 조심스러웠다. 그 눈빛을 외면하며 고개를 창가로 돌렸다. 레카가 왜 그랬는지 안다. 나는 엄마 아빠가 없기 때문이다. 샬리니가 엄마 이야기를 꺼내서가 아니라 레카가 샬리니의 입을 막은 게 씁쓸했다. 난 아무렇지 않은데. 뭐, 이런 상황은 이제 익숙하다.
세 살 때였나? 엄마 아빠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게. 고아가 될 뻔한 나를 받아준 사람은 큰아버지였다. 사업에 번번이 실패해 힘든 형편이었지만 큰아버지는 나를 가족으로 기꺼이 받아주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불편했다. 큰아버지 집에 남동생이 태어나고부터는 더. 안 그래도 힘든 가정 형편에 내가 커다란 짐이 된 느낌이랄까.
“리나!”
디비야가 나를 불렀다.
“선생님이 너 오라시는데?”
“아, 고마워.”
선생님이 찾는 이유가 짐작이 갔다. 전국 에세이 대회 때문이겠지. 교무실로 들어갔다.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못마땅한 듯 물었다.
“선생님은 네가 에세이에 관심이 많은 줄 알았는데. 왜 참가하지 않니?”
뭐라고 해야 할까 망설였다. 사실 에세이에 특별히 관심이 많은 것이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이 나를 엄마 아빠 없이 자랐다고 얕볼까 봐 뭐든 열심히 한 것뿐이다. 성적은 상위권을 유지했고, 대회라는 대회는 다 참가했다. 그중 에세이 대회에서는 상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하니 선생님이 이러실 만했다.
참가하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 대회에서 상을 받을 때 주위를 둘러보면 상을 못 받은 아이들은 엄마에게 위로를 받았다. 상을 받은 나보다 상을 못 받아도 엄마에게 위로받는 아이들이 더 행복해 보였다. 나는 더 이상 상을 받아도 기쁘지 않았다. 대회에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물론 틈틈이 적어놓은 에세이가 있긴 하지만 그냥 관두기로 했다.
“그냥, 그냥요.”
계속되는 선생님의 질문에 얼렁뚱땅 둘러대고 교무실을 나왔다.
“무슨 일이야?”
교실로 들어오자마자 프리야가 물었다. 프리야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다. 다른 아이들이 나를 엄마 아빠 없는 아이라고 의식할 때, 프리야만큼은 나를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에세이 대회 때문에.”
“정말 참가 안 할 거야? 네가 나가면 분명 상 받을 텐데.”
“상은 무슨, 나가기만 하면 다 상 받는 줄 아니? 받는다고 해도 썩 기쁘지도 않고….”
프리야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도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딩동댕동.
침묵을 깨는 종이 울렸다. 체육 시간이다. 체육 시간은 비교적 자유롭다. 공부든 운동이든 선택해서 할 수 있다. 여자애들은 주로 삼삼오오 모여 떠들거나 그네에 앉아 공부를 한다. 나는 프리야와 배드민턴을 치기로 했다. 라켓을 가지러 가는 길이었다.
“아야!”
제니가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사과 한마디 없이.
커다란 덩치, 불퉁한 볼에 가득한 여드름, 입술이 두꺼워 두꺼비라고 불리는 제니. 제니는 나를 싫어한다. 한 번도 피해 준 적이 없는데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리나, 괜찮아? 야, 너 뭐야!”
프리야가 제니에게 따졌다.
“흥, 조심하지 않은 걔가 잘못이지.”
“뭐?”

집 앞에서 남동생 아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만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헤벌쭉 웃으며 달려왔다.
“내가 사 오라고 한 막대사탕 사 왔어?”
내가 아니라 간식거리를 기다린 것이었다.
“아, 아니.”
“왜! 내가 사 오라고 했잖아잉.”
“야, 그런 거 먹으면 몸에 안 좋다고 큰어머니가 싫어해.”
“흥! 그럼 돈이라도 줘. 내가 사 먹게.”
얘는 어쩜 클수록 얄미워질까. 한 대 콕 쥐어박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1루피도 없으니 저리 가.”
“거지 누나한테 물어본 내가 바보지, 칫.”
“이게!”
“엄마!”
한 대 쥐어박으려 했더니 잽싸게 도망쳤다. 마침 집에서 큰어머니가 나오자 아만은 큰어머니 치마 뒤에 숨어서 고개만 내밀고 나를 약 올렸다. 아휴, 내가 참자.
“리나 왔구나? 아만, 너 또 누나 괴롭혔지?”
“아야! 잘못했어요!”
큰어머니는 아만의 귀를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쌤통이었다. 그래도 엄마한테 쪼르르 갈 수 있는 아만이 조금은 부러웠다. 자전거를 세우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늘 학교는 어땠니?”
큰아버지였다.
“아, 좋았어요.”
“선생님이 전화하셨다. 에세이 대회에 참가 안 한다면서.”
“….”
“네가 에세이를 잘 쓰잖니. 매번 대회에 참가했는데 이번에는 무슨 일 있니?”
“일은요, 그냥 싫증이 나서요.”
“그래.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하렴.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그럴게요, 큰아버지.”
“허, 아빠라고 부르라니까.”
큰아버지는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큰아버지는 좋은 분이다. 하지만 ‘아빠’라는 말은 선뜻 나오지 않는다.
힘겹게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오전 6시 30분. 씻고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나물 사세요! 나물!”
나물 장사 아주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 그제 이틀 나물을 안 먹었으니 오늘은 먹을 것 같았다. 큰어머니가 나물 사 오라고 곧 부르겠지.
“리나! 나물 두 단만!”
역시.
우리 동네에는 아침마다 머리에 무거운 바구니를 이고 나물을 파는 아주머니가 있다. 바람 불면 날아갈 것같이 연약한 몸으로 커다랗고 묵직한 나물 바구니를 어떻게 머리에 이고 다니는지 늘 궁금했다.
“아주머니, 나물 두 단 주세요.”
“그래, 좋은 걸로 골라줄게.”
“그런데 아주머니는 왜 이렇게 일찍 나물 팔러 나오세요? 안 피곤하세요?”
“나한테 너만 한 딸이 하나 있거든. 얼마나 예쁘고 공부는 또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 나물 많이 팔아서 딸한테 좋은 것 사주려면 일찍 나와야지. 자, 여기.”
아주머니는 묵직한 바구니를 다시 이고 나물을 사라고 외쳤다. 목소리가 정말 우렁찼다.
밥을 서둘러 먹고 학교로 향했다. 3교시 후,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나를 기어이 대회에 내보내려는 것 같았다.
“교장 선생님이 이번 에세이 대회에 네가 꼭 참가했으면 하시더라. 재능을 썩히는 게 아깝다고 하셨어.”
“….”
“그리고 1등 하면 장학금 3만 루피를 준다니까 너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네?”
깜짝 놀랐다. 3만 루피라면 큰아버지 짐을 한결 덜어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선생님은 벌써 내 이름을 명단에 적었다.
“내일이 마감이다. 하루밖에 안 남았지만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열심히 해봐!”
자리로 돌아와 가방 깊숙이 넣어뒀던 원고를 꺼냈다. 욕심이 났다. 미리 써둔 이 에세이를 조금만 수정하면 될 것 같은데. 장학금을 받아서 그동안 나를 보살펴준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리나, 체육 시간이야. 오늘 나랑 배드민턴 시합하기로 했잖아, 빨리 가자!”
프리야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어어, 잠깐만.”
“빨리빨리!”
원고를 책상에 내려놓고 급히 운동장으로 나갔다. 이번에도 프리야가 이겼다. 프리야는 배드민턴 칠 때 봐주는 법이 없다.
프리야와 수다를 떨면서 교실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나는 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책상 위에 놓았던 에세이 원고가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글씨가 번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장학금의 꿈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돼버렸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꺼림칙한 기분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는 비웃으며 나를 보던 제니가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나를 보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