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관찰하기


×월 ×일 금

오늘 문학 숙제는 좀 아니다.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등 아빠에 대해 관찰해서 A4용지 한 장을 꽉 채워 오란다. 초딩도 아니고 문학 작품 조사나 하라고 하지.
감수성이 풍부하신 문학 샘은 숙제 마감 전까지 사랑한다는 문자메시지도 꼭 보내란다. 일일이 확인하고 수행 평가에 반영한다고. 아빠랑은 평소에 말도 잘 안 하는데 어쩌라는 거지.
아, 이번 숙제 망했다.


×월 ×일 일

친구들이랑 축구하기로 했는데 취소됐다. 어차피 평일에는 아빠나 나나 늦게 들어와서 오늘 좀 알아보자고 마음먹고 하루 종일 아빠 옆에 있었다.
당연히 아빠 관찰하기는 실패다. 아빠랑은 같이 있는 것조차 어렵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할 말도 없고, 완전 어색어색. 정말 못할 짓이다.
아빠 성격이 묵묵한 탓이다. 나도 그렇지만 어떻게 아빠가 아들한테 말 한마디를 안 거냐. 훈석이네 아빠는 일요일이면 함께 여행도 가고 친구처럼 지낸다던데. 우리 집에서는 외계의 일이다. 아빠는 대체 왜 그러지?


×월 ×일 월

며칠째 머리가 계속 아프다. 몸에 힘도 없고. 외출증 끊고 병원에 갔더니 스트레스성 두통이라고 했다.
감기도 안 걸리는 애가 아프다니까 엄마가 엄청 걱정했다. 공부도 좋지만 몸 생각해서 쉬엄쉬엄하란다. 열심히 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ㅋㅋㅋ
방금 들어온 아빠는 아들이 아프다는데 반응이 “그래?”가 전부였다. 뭐, 기대하지도 않았다. 얼른 약 먹고 자야겠다.


×월 ×일 화

엄마가 곰국을 해줬다. 나 몸보신하라고 하루 종일 끓였단다. 웬일로 아빠도 일찍 퇴근해서 같이 먹었다. 아빠는 밥만 먹고 바로 주무셨다. 아무 말이라도 걸고 싶었지만 진짜 피곤해 보여서 한마디도 못했다.


×월 ×일 수

어제 TV 보다가 거실에서 잠들었다. 아빠 때문에 일찍 깨서 오늘 진짜 피곤했다. 무슨 출근을 새벽 5시 반에 하냔 말이다! 7시에도 겨우 일어나는 내가 새벽에 눈을 떴으니 말 다했지. 아빠는 내가 거실에서 뒤치락거리니까 이불을 덮어주고 나갔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시각은 밤 11시 23분. 이제 들어와서 씻고 자면 또 몇 시간 안 돼서 출근한다. 여태 매일매일 그랬던 건가?

×월 ×일 금

책상에 비타민이 놓여 있었다. 웬 건가 싶어서 엄마한테 물어봤다. 아빠가 사 온 거란다, 나 아프다고. 하나도 걱정 안 하는 척하더만.
그나저나 비타민 챙겨 먹어야 할 사람은 아빠 같던데.


×월 ×일 월

오늘 숙제 없음! 학원 일찍 끝남!
기분 좋아서 엄마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빨래를 갰다. 남색 옷이 많았다. 다 아빠 거였다. 아빠는 티셔츠도 남색, 바지도 남색, 양말도 남색이다. 엄마는, 아빠가 남자는 남색이라며 뭘 사든 남색만 고집한다고 했다. 아빠가 남색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17년 살면서 처음 알았다. 패션 감각이 꽝이라는 건 진작 알았지만.

×월 ×일 화

책장에서 책 찾다가 옛날 앨범을 봤다. 아빠 엄마 젊을 적 사진이 있었다. 난 진짜 얼굴이 아빠 판박이다.
아빠 사진은 거의 낚시하는 사진이었다. 낚시 좋아하셨냐고 아빠한테 물었더니, 낚시왕으로 동네에서 이름 좀 날렸다고 한다. 미끼를 던지기만 하면 물고기가 덥석덥석 물었다고. 허풍인 것 같지만 믿어주는 척했다. 아빠가 그렇게 열띠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아! 엄마가 금요일이 아빠 생신이라고 귀띔해줬다. 다행이다. 작년처럼 지나고 알지 않아서. 엄마 땡큐!


×월 ×일 목

내일은 아빠 생신이다. 고등학생이나 돼서도 제대로 챙긴 적이 없어서 진지하게(!) 선물을 고민해봤다. 땀이 많은 아빠에게 손수건이 좋을 것 같아서 손수건을 샀다. 남색으로 할까 하다가 아빠 패션 센스 좀 살려줄 겸 가을이랑 어울리는 감색으로 골랐다. 직접 주기는 민망해서 아빠 씻을 때 축하 카드랑 같이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아빠 반응이 궁금하다.


×월 ×일 금

아빠가 야근하는 바람에 생신 파티도 못하고 선물 반응도 못 살폈다. 대신 일요일에 바다 가기로 했다. 어릴 때 가족 여행 가본 이후로 진짜 오랜만이다. 기대되면서 한편으로 걱정된다. 재미없으면 어떡하지? ㅡㅡ;;


×월 ×일 일

처음으로 바다낚시를 했다. 나도 꽤 소질이 있는 듯!
아빠는 엄청 신났다. 낚시왕이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미끼를 던지는 족족 물고기를 낚았다. 좀 멋짐.
아빠가 잡은 고기로 회 뜨고 매운탕까지 해 먹었다. 가끔은 아빠랑 낚시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월 ×일 수

이번 금요일이 숙제 마감일이다. 오늘 숙제 다 하고 자야겠다. 처음에는 숙제할 생각에 막막했는데 생각보다 꽤 쓸 말이 생겼다. 숙제 덕분에 아빠를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할까. 요즘은 아빠랑 꽤 통하는 느낌이다.
그동안 미루고 미뤘던 문자메시지도 보냈다. 차마 사랑한다고는 못하겠어서 그냥 힘내시라고 보냈다. 아빠도 답장해줬다.
「고맙다」
긴 답장은 기대 안 했다. 그 아빠에 그 아들인 거지.

×월 ×일 금

숙제 제출 완료! 문학 샘이 사랑한다는 문자메시지 안 보냈다고 점수 안 준다길래 바로 그 자리에서 아빠한테 사랑한다고 보냈다.
역시 아빠. 답장 한번 짧고 굵다.
「나도」
아, 지금 생각하니까 소름이 돋는다. 내가 정말 사… 사랑한다고 말한 건가. 밤새 이불 킥 하겠군.


×월 ×일 일

엄마가 감을 깎아줬다. 아빠가 감을 예사롭지 않게 쳐다봤다. 엄마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아빠는 감빛이 참 좋다고 했다. 웃음 참느라 혼났다.
같은 남자로서 확신한다. 아빠는 내가 준 감색 손수건이 아주아주 마음에 든 거다. ㅋㅋ
솔직히 아빠의 표현력은 제로라 앞으로도 훈석이네처럼 친구 같은 부자지간은 되기 힘들 것이다. 그래도 난 지금에 만족한다. 우리 아빠는 우리 아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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