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역은 탄생 역입니다.」
“응애응애!”아기가 울고 있다. 저 아기는 나다! 엄마가 나를 바라보며 팔을 벌렸다. 기억난다. 이때 나는 처음 마주한 세상이 낯설어 엉엉 울었다. 엄마가 간호사에게 나를 받아 안았다. 엄마 품은 편안했다. 두근두근. 열 달 동안 엄마 배 속에서 들었던 익숙한 엄마의 심장 소리.
아빠가 내 코를 살짝 눌렀다.
“여보, 이 코 좀 봐. 귀엽지 않아?”
“그러게요, 당신 코하고 꼭 닮았어요.”
갑자기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난다. 뭔지 모를 책임감까지 든다. 아, 이건 아빠 엄마의 감정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빠 엄마가 이런 기분이었구나.
띠링.
스피커에서 신호음이 울리자 기억이 흔들거리며 사라졌다.
「이번 역은 졸업 역입니다.」
박수 소리에 깜짝 놀랐다. 아아, 맞다. 유치원 졸업식 때 열린 공연 무대다. 이날 엄마가 안 와서 친구들한테 엄마 없냐고 놀림받았다. 그래서 아빠한테 엄청 투정 부렸다.“엄마, 엄마 어디 있어. 엉엉.”
아빠가 나를 달랜다.
“루시, 엄마가 못 와서 진짜 미안해하고 있어. 엄마도 루시가 공연하는 거 정말 보고 싶어 했는데. 대신 아빠가 왔으니까 울지 마. 네가 운 거 알면 엄마도 슬퍼할 거야. 그런데 누구 닮아서 춤을 그렇게 잘 추지?”
아빠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들어 안았다. 나의 감정은 원망과 짜증인데 아빠는 그저 기쁨이다.

띠링.
「이번 역은 학교 역입니다.」
아, 학교다! 어릴 때 난 낯을 많이 가렸다. 학교에는 처음 보는 아이들만 있어서 무서웠다. 나는 계속 자리에만 앉아 있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안녕? 나는 베스 앤 무어야. 이 과자 좀 먹을래?”
쉬는 시간, 나에게 다가온 아이는 앤이다.
잊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앤에게 고마워했는지. 앤 덕분에 학교에 같이 갈 친구도 생기고, 다른 친구들도 쉽게 사귀었는데….
「3가지 기억 여행이 끝났습니다. 이제 당신의 기억과 연관된 사람의 일부 기억으로 이동합니다.」
띠링.「이번 역은 탄생 역입니다.」
다시 과거인가?“응애응애!”
처음에 들었던 울음소리다. 엄마가 나를 안고 기뻐하고 있다. 잠시 후 간호사가 말했다.
“아이가 예정일보다 빨리 태어나서 각별히 주의하셔야 해요. 경과를 지켜보고 퇴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생명에는 지장 없는 거죠? 하… 우리 딸, 미안해. 엄마가 밥 많이 먹고 태교도 잘할걸.”
엄마가 너무 마음 아파한다. 죄책감도 느낀다. 나는 예정일보다 한 달 일찍 나와서 몸집이 작고 약했다고 들었다. 그게 엄마 잘못은 아닌데….
띠링.
「이번 역은 졸업 역입니다.」
아빠랑 또 만나겠네. 예상대로 아빠가 보인다. 그런데 여기는 유치원이 아니다. 병원이다. 엄마가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여보, 나 없이 괜찮겠어?”
아빠는 엄마 손을 꼭 잡았다.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하다.
“그럼요. 조금 있으면 엄마 오신다니까 얼른 가요. 루시가 많이 기다릴 거예요. 루시한테 미안하다고, 엄마가 많이 사랑한다고 전해줘요.”
맞다. 유치원 졸업할 때 동생이 태어나는 바람에 엄마가 못 왔지. 엄마가 정말 미안해했었네. 아빠는 엄마랑 동생이 걱정됐을 텐데 나한테 조금도 티내지 않았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띠링.
「이번 역은 학교 역입니다.」
앤이 자리에 앉아 과자가 든 봉지를 계속 주물럭거리고 있다. 풉, 나한테 줄까 말까 고민했었구나. 쉬는 시간, 앤이 조심스럽게 일어나 내 자리로 와 인사했다.“안녕? 나는 베스 앤 무어야. 이 과자 좀 먹을래?”
“응? …응, 고마워.”
앤이 기뻐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엄마한테 자랑한다.
“엄마, 엄마! 저 오늘 엄청 예쁜 친구를 사귀었어요. 이름은 루시고요. 우리 집 가까이 살아요.”
엄마 손을 잡고 창가로 달려간다.
“저기, 저기 빨간 지붕에 산대요. 나중에 집에 초대해도 돼요?”
앤, 정말 고마워.
띠링.
「이번 역은 기억 총집합 역입니다. 당신의 기억 데이터를 한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와, 벽마다 수많은 기억들이 모니터 화면처럼 나열돼 있다. 앤과 뒷동산에서 발견한 오두막을 아지트로 삼았던 기억, 할머니의 생신 파티 날 노래한 기억, 노느라 밤늦게까지 집에 안 들어가서 혼났던 기억 등.「당신의 기억 여행이 곧 끝납니다. 기억 여행자는 기억을 하나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떤 기억을 바꾸시겠습니까?」
기억 여행자만의 특권, 지금 아니면 앞으로 영원히 기회는 없다. 기억을 바꿔보고 싶다. 무슨 기억을 바꾸지? 혼난 기억? 창피한 기억? 슬픈 기억? 아픈 기억?띠링.
「현재 시각은 17시 55분입니다. 5분 후 시스템 자동 설정에 의해 기억 여행이 끝납니다. 바꿀 기억을 선택해 주세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그것들을 바꾸면 어떻게 될까? 그때 느꼈던 나의 감정은? 다른 사람의 기억은? 다른 사람의 마음은?“저기… 꼭 기억을 바꿔야 하나요?”
띠링.
「…아, 아! 루시, 내 말 들리니?」
“에드거 아저씨?”
「특권을 사용하고 싶지 않니?」
“…그러려고요. 아무리 짜증나고 슬펐던 기억도 누군가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고마워할 수 있는 기억이었어요. 제가 기억을 바꾼다면 그 느낌이 사라지겠죠? 또 저와 연관된 사람들의 감정까지 뒤바뀌잖아요. 그건 싫어요. 기억 하나하나가 다 소중해요. 살면서 다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순간순간의 감정들이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서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일 테니까요.”
「허허, 좋다. 이제 기억 여행이 2분 남았구나.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10년 전, 기억 여행자였던 켈리 부인 기억하니?」
“그럼요. 빵집 아주머니잖아요.”
「켈리 부인이 기억 여행에서 본 건 소문처럼 부모님의 빵 레시피가 아니었단다. 빵을 만들며 행복해하던 부모님의 모습을 보았지. 그녀의 부모님은 딸에게 맛있고 건강한 빵을 먹이고 싶어 했어. 어린 딸이 맛있게 먹으면 기뻐했고, 그런 마음으로 빵을 만들어 팔았단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값없이 빵을 나누어 주었지. 켈리 부인은 자기를 사랑해주고 이웃을 돌보았던 부모님의 따뜻한 마음을 본 거야. 그리고 현실로 돌아가 기억 여행에서 느꼈던 행복한 마음으로 빵을 만들었어. 그거야말로 황금 레시피 아니겠니? 시간이 다 됐구나. 루시, 현실에서 다시 만나자. 네가 아주 자랑스럽다.」
띠링.
「카운트다운을 시작합니다. 5, 4, 3, 2, 1.」
삐-.“…어나. …일어나. 누나! 일어나라고!”
“으….”
“누나, 어디 아파? 아프면 안 돼. 오늘 여행 가는 날이잖아.”
여행은 끝났는데. 뭐지? 여긴 내 방 침대잖아!
“오늘 몇 월 며칠?”
“왜 이래, 누나 생일인 거 확인해줘? 네, 8월 8일 맞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 가족 휴가 가는 날이고요. 어제 할아버지 할머니도 모시고 왔잖아.”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뭐야?”
“세상에, 오하나 씨 왜 이러십니까? 엄마! 누나 이상해. 자꾸 헛소리해.”
현재가 방에서 뛰어나갔다. 나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정신이 쏙 빠진 나는 몽롱하게 방에서 나왔다. 엄마 아빠가 짐을 현관 앞으로 옮기고 있다.
“허허. 이제 일어났구나. 잠이 많으면 미녀라던데.”
에드거 아저씨…가 아니라 할아버지!
정신 차려, 오하나!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두 번 세게 쳤다. 설마, 다 꿈이야? 그래도 꿈이라서 다행이다. 모두의 기억, 감정 들을 잊어버리지 않아서.
시간이 흐르면 기억과 감정이 다시 잊힐까?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아야겠다. 나의 기억을 함께 만들어줄 사람들이 내 곁에 있으니까.
앞으로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들을 겪을 것이다. 그 순간들은 어떻게, 얼마나 기억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건 안다. 아픈 기억이든 기쁜 기억이든 금방 잊게 될 기억이든 오래 간직될 기억이든, 다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주는 소중한 기억이라는 것을. 그러니 지금을,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마음껏 사랑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