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여행 上

“루시, 준비됐어?”
1층에서 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지금 나가!”
나는 거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엄마가 사준 원피스를 입고 새 구두까지 신으니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이 정도는 입어줘야지.
“늦겠어. 빨리 나와!”
앤의 재촉에 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현관 앞에서 팔짱을 끼고 나를 쏘아보던 앤은 금방 인상을 풀었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아네모네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에는 벌써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13월이라니!”
“새로운 기억 여행자는 누가 될까?”
“이번에는 8월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서 뽑는대.”
사람들은 기억 여행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13월은 10년에 한 번 찾아오는 기적 같은 달이다. 13월이 되면 한 달 내내 아네모네 광장에서 축제가 이어진다. 13월의 첫날은 더 특별하다. 기억 여행의 주인공이 발표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네모네 성에는 아네모네 시민들의 기억을 저장해 보관하는 기억저장소가 있다. 기적의 달 13월이 되면 시민 중 한 명을 뽑아 기억저장소의 데이터를 이용해 자신의 기억을 다시 보여준다. 이것이 기억 여행이다. 지나간 기억을 보는 기분은 어떨까?
10년 전, 그러니까 내가 여섯 살 때 우리 집 앞 빵집 아주머니가 기억 여행자로 뽑혔다. 아주머니의 부모님도 작은 빵집을 운영했는데, 빵이 정말 맛있어서 다른 지역에서 찾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기억 여행을 통해 부모님의 빵 만들기 비법을 찾았다. 지금 아주머니네 빵집은 아네모네 성의 명물이다.
그때 아주머니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한다. 나도 기억 여행을 꼭 해보고 싶다는 소원이 생길 정도로 행복한 얼굴이었다. 아직 어려서 내가 뽑힐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조금은 기대해본다. 내 생일이 8월이니까.

반짝이는 연미복을 입고 흰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넘긴 노년의 신사가 광장 무대 위로 올라왔다. 기억저장소 시스템 관리자인 에드거 아저씨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셨네요. 특별한 순간을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모두 기억 여행의 주인공이 되고 싶으신가요?”
“네!”
사람들은 팔을 뻗으며 외쳤다. 물론 나도.
“다들 기대감이 크군요. 현재 시각은 13월 1일, 13시가 되기 3분 전입니다. 정확히 13시 1분에 올해 기억 여행의 주인공을 발표할 건데요, 누구일지 정말 궁금하네요. 자, 기억 여행의 주인공을 아네모네 성의 성주께서 발표해주시겠습니다.”
사람들이 함성과 함께 박수를 쳤다. 파란색 제복을 입고 어깨에 금색 띠를 두른 성주가 무대 위로 입장했다.
“오, 이제 곧 13시 1분이군요. 이번 기억 여행의 주인공을 바로 발표하겠습니다. 기억저장소 시스템이 뽑은 행운의 주인공은….”
광장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성주가 금빛 봉투에서 카드를 꺼내 확인하고 다시 마이크에 입을 댔다.
“8월 8일에 태어난… 메건 루시 양입니다. 축하합니다!”
성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 있던 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팔을 툭툭 쳤다.
“루시! 네가 뽑혔나 봐!”
“나? 나라고?”
“메건 루시 양은 무대 위로 올라와주세요.”
에드거 아저씨가 나를 보고 손짓했다. 나는 앤에게 떠밀리다시피 무대로 올라갔다.
“이거 꿈 아니죠? 정말 저예요?”
“그럼요. 여기 있는 모든 시민들이 증인입니다. 루시 양의 표정을 보니 아직도 안 믿기나 보군요. 실은 저도 믿기지 않네요. 루시 양은 최연소 기억 여행자로 기록될 거예요. 마음을 진정시킬 겸 질문 하나 드릴게요. 기억 여행을 하게 되면 어떤 기억을 보고 싶나요?”
나는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으음… 저는 제가 태어났을 때가 궁금해요. 자기가 태어난 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리고 잊어버린 어릴 때의 기억을 보고 싶어요. 제가 지금까지 어떻게 컸는지 알고 싶거든요. 제가 처음 말했을 때랑 첫걸음마를 탔을 때랑 유치원 다녔을 때… 아유, 너무 많아요.”
사실 기억 여행자로 뽑히면 진짜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기억 여행자에게 주어진다는 ‘기억 바꾸기’ 특권. 자신의 기억을 원하는 대로 딱 한 번 바꿀 수 있는 권한이다.
“그럼 루시 양의 기억 여행이 행복하길 기원할게요. 다른 분들은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고, 13월 내내 이어지는 축제를 마음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에드거 아저씨는 나를 무대 뒤로 따로 불렀다.
“허허, 루시. 기억 여행의 주인공이 된 걸 정말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떨리지는 않니?”
“솔직히 많이 떨려요.”
“그래, 그렇겠지. 그런데 시간이 별로 없구나. 조금 있으면 기억 여행을 시작해야 되니까 기억 여행의 진행 방식과 주의사항을 알려주마. 먼저 이 종이에 자세히 보고 싶은 기억 3가지를 적어주겠니?”
에드거 아저씨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기억 여행은 15시부터 18시까지 세 시간 동안 진행될 거란다. 보고 싶은 기억을 여행하면서 그 기억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감정도 느낄 수 있지. 내 기억과 연관된 다른 사람의 기억도 볼 수 있을 거고. 하지만 기억 여행이 끝나면 너의 감정만 기억에 남고, 다른 사람의 기억과 감정은 잊히게 된다. 참, ‘기억 바꾸기’ 특권에 대해서는 아니?”
“네, 네!”
“기억을 바꿀 때는 신중 또 신중해야 해. 만약 악용할 마음으로 자신의 기억을 조작하려 한다면 기억저장소 시스템이 권한을 제한할 거다. 기억저장소에 대한 정보는 국가 기밀이라 유출시키지 않겠다는 서약서도 작성해야 한단다.”
나는 서약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에드거 아저씨가 준 종이에 내가 태어났을 때, 유치원 졸업할 때,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를 썼다. 다른 사람이 보면 고작 이런 기억을 보고 싶냐고 뭐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16년을 산 나에게는 한 번쯤 확인하고 싶은 기억이다.
에드거 아저씨가 종이를 받아 훑어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기억저장소 센터로 갈까?”
아저씨를 따라 달팽이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작은 열차로 연결됐다. 열차 속으로 들어가자 여러 대의 컴퓨터 기계와 1인용 의자가 보였다. 아저씨는 나를 의자에 앉히고, 복잡한 선으로 컴퓨터와 연결된 헬멧을 내 머리에 씌웠다.
“루시, 기억을 옮길 때마다 언제의 기억인지 컴퓨터가 음성으로 알려줄 거야. 처음에는 멀미가 날 수도 있을 게다. 그러면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렴. 조금 편해질 거다. 그럼 시작할까?”
“네!”
“행운을 빈다.”
몸이 스르르 풀리고 주변이 흐물흐물해졌다. 눈을 꼭 감고 크게 숨을 쉬었다. 블랙홀에 빠진 느낌이다.


G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