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가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며 말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종 바로 아래쪽에 달린 커다란 시계는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흘러가듯 책 또한 멈추지 않고 일생을 빠짐없이 기록하리라. …참 멋진 뻥이야, 그치?”
테일러가 한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한스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 시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지! 바로 그거야!”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서 한스만 쳐다봤다.
“여기 밑에 시계를 봐. 시계가 그냥 알아서 돌아가겠어? 저 시곗바늘을 돌리는 톱니바퀴 같은 기계가 있다는 뜻이잖아. 분명 여기 밑에 조정실 같은 방이 있을 거야. 다시 내려가보자, 어서!”
한스가 서둘러 층계를 내려갔다. 아이들은 엉겁결에 한스를 따라 내려갔다.
“한스, 다 같이 올라오면서 봤지만 방 같은 건 없어. 시계야, 다른 데서 조정할 수도 있는 거고. 잘 봐봐, 계단뿐이잖아.”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한스는 도로시 말을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만약에 정말로 방을 찾으면 그 기념으로 톱니바퀴 하나 빼올래.”
“그러다 시간이 거꾸로 가면?”
“호호, 아주 재밌겠는데. 어서 빨리 방을 찾아야겠어. 뭐, 여기 어디 누르면 ‘열려라, 참깨’처럼 벽이 열리려나?”
“그리고 뭔가가 확 튀어나오겠지?”
“그럼 테일러가 ‘으아아악’ 소리 지를걸?”
클로에와 앤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깔깔댔다.
“얘들아….”
농담 속 등장인물이었던 테일러가 친구들을 불렀다.
“아, 또 왜?”
“너 그 뒤에서 뭐하는데?”
“여, 여기.”
테일러가 눈짓으로 벽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테일러 손에 눌린 벽돌이었다.

벽이 양옆으로 열리더니 복도가 앞으로 쭉 이어졌다.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맙소사, 진짜였어. 비밀의 방이 진짜 있었다고! 야호! 테일러, 넌 진짜 친애하는 친구야!”
한스가 복도로 가장 먼저 뛰어 들어갔다.
“테일러, 네가 일을 낼 줄 알았다니까.”
“테일러, 너 진짜 듬직하구나.”
“테일러, 정신 차리고 빨리 따라 들어와.”
앤과 클로에가 안으로 들어가고, 새파랗게 질린 테일러는 도로시가 끌고 들어갔다.
드르르륵- 쿵
“한스! 문이 닫혔어.”
“걱정 마. 테일러가 어떻게든 열어줄 거야. 흩어져서 책을 찾아보자!”
문을 열어줄 당사자는 박제나 다름없는 상태였지만,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고 방 곳곳을 둘러봤다. 방 내부는 예상했던 대로 시계를 움직이는 톱니바퀴들과 여러 기계들이 있었다. 크고 작은 톱니바퀴들이 하나로 딱딱 맞물리는 소리가 신비로웠다.
“세상에나! 여기, 이쪽으로!”
앤이 부른 곳은 전혀 새로운 공간이었다. 세상의 모든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수만 가지 색의 화려한 책들이 공간 전체에 꽂혀 있었다. 아니, 책은 꽂혀만 있지 않았다. 중간중간 책들이 쏙 빠져나와 책장을 펼치고 둥둥 떠다녔다. 그리고 날개 달린 잉크펜이 종이 위를 정신없이 날아다니며 무언가를 적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여기는 시간과 공간이 뒤섞인 비밀의 방이야. 너는 내 친구 테일러고. 어떡하지? 내가 너를 다독여줘야 할 것 같은데.”
한스는 해맑은 표정으로 테일러에게 어깨동무했다.
“팔 좀 내려줄래. 쓰러질 거 같거든.”
한스는 큭큭 웃고는 테일러를 부축해 공간 한편에 앉혔다.
“와, 한스 말이 맞았어. 기록 책은 전설이 아니었어.”
공간 속의 책들을 우러러보며 춤을 추듯 동그랗게 빙빙 돌던 클로에가 감탄했다.
“우리 책도 있을까? 있어도 문제다. 이 많은 책 중에 우리 책을 어떻게 찾아. 찾다가 여기서 늙어 죽겠다. 그럼 책이 이렇게 기록하려나? ‘나 찾다가 끝났지롱’.”
앤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오직 테일러만 쭈그려 앉아 아래쪽에 꽂힌 책을 만지작거리며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만 중얼거렸다.
“테일러, 함부로 만지지 마. 네 책도 아니잖아.”
그때였다. 테일러가 만지작거리던 책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바스러져 가루가 되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 진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테일러는 완전 사색이 됐다.
“콜록콜록.”
“근데 누가 기침을 그렇게 할아버지처럼 하니?”
“난 아냐.”
“나도.”
“나도 아닌데.”
테일러의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친구들 뒤쪽을 가리켰다. 넷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으아아악!”
“콜록콜록. …너희는 어째 나만 보면 ‘으아아악’이냐.”
할아버지는 넷을 무심히 지나치고는 테일러에게 갔다. 그리고 테일러 바로 옆, 사라진 책의 빈자리를 응시했다. 할아버지의 눈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기를 보는 것이 분명했다.
“제, 제가 한 거 아니에요. 가만히 여기 앉아 있는데, 갑자기 책이 툭 떨….”
“프랭클린 부인이 떠나셨군. …그리 벌벌 떨 것 없다. 그 책은 필요한 곳으로 이동한 것뿐이다.”
“하, 하. 그렇죠? 제 잘못 아니죠? 휴, 살았다.”
테일러 얼굴에 핏기가 살짝 돌아왔다.
“아니, 잠깐. 할아버지! 귀 안 먹으셨네요? 말도 하시잖아요?”
“네가 내 귀에 고래고래 소리 질러서 귀먹는 줄 알았다.”
“그러게 그냥 말씀하셨으면 할아버지도, 저희도 좋았잖아요. 전 목 나가는 줄 알았어요!”
할아버지는 테일러를 무시한 채 등을 돌려 나머지 아이들을 향해 섰다. 아이들은 정신이 반쯤 나가 보였다.
“다섯이라니… 방이 아주 활짝 열렸구만.”
방이라는 말에 한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아셨던 거죠? 비밀의 방이 열릴 거라는 것도, 기록 책도?”
“오호, 내 네 얼굴을 알지. 심심할 때마다 시간의 탑을 기웃거리던 녀석. 드디어 네가 원하는 것을 봤겠구나. 어떠냐, 좋으냐?”
“좋아요! 좋긴 한데… 궁금한 것들이 더 많아졌어요. 그 백 년에 한 번이라는 때가 지금이에요? 저희가 선택된 뭐 그런 거고요? 아, 책은 왜 색이 다 달라요? 아까 말씀하신, 책이 이동했다는 거, 어디로요? 그리고….”
“그만, 그만. 됐다. 들어봐야 끝이 없겠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련다. 너희는 그냥 들어라. 다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할아버지는 공간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두 다리도 정정한 것이 확실했다.
“백 년에 한 번이라…. 사람들은 툭하면 백 년에 한 번이라지? 그런 시간 개념은 모르겠다. 여기를 보는 사람이 극히 드물게 나올 뿐이야. 이런 단체 관람은 더더욱. 선택? 참 멋있는 말이구나. 선택된 자라면 선택된 자겠지만 글쎄, 그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달렸지. 이런 일을 겪고도 의미 없이 살아간다면 선택받았다 한들 뭔 큰 의미가 있겠니?”
“치, 말씀 엄청 잘하시는구만.”
할아버지의 한쪽 흰눈썹이 높이 들리면서 테일러를 향해 눈이 번쩍였다. 테일러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 책 표지는 똑같은 색이 하나도 없지. 한 권의 책이라도 여러 가지 색들이 책을 감싸고 있어. 그리고 그 색은 바뀌기도 한단다. 책 주인의 성격이나 마음에 따라서, 그 안에 쓰이는 기록에 따라서. 그래도 한번 잘 봐라. 저렇게 다른 색의 책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꽂혀 있으니 아름답지 않니? 물론 다 아름다운 건 아니야. 책 주인의 마음 상태가 형편없거나 기록 내용이 영 아니다 싶으면 책 표지도 곰팡이 핀 것처럼 거무죽죽해진단다. 저 날개 펜도 말이야, 쓰기 싫은 내용이면 막 휘갈겨서 써버려. 짜증이 나는 거지. 껄껄.”
할아버지는 날개 펜을 하나 잡아 날개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저 책들은 그냥 쓰이는 게 아냐, 나중에 필요해서란다. 여기서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그다음 시간을 판가름한다고 해야 할까. …마을에 이런 전설이 전해지지.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흘러가듯 책도 일생을 빠짐없이 기록하리라. 맞는 말이다. 지구가 도는 한, 시간이 흐르는 한 기록은 멈추지 않아. 이렇게 생각하자. 지구가 계속 돌아가면서 시간이라는 필름에 너희 모습을 담고 있다고. …너희가 나중에 보고 후회하지 않을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으면 좋겠구나. 한마디로 허투루 살지 말라는 거다.”
“할아버지, 그럼 저희 책 지금 볼 수 있어요?”
역시 도로시였다. 모두가 원하는 바를 콕 집어 이야기하는.
할아버지의 수염이 실룩거렸다.
“껄껄껄. 그래, 보고 싶겠지. 근데 지금 봐서 뭐할 거냐? 다 지나간 과거일 뿐이란다. 특히나 너희는 앞으로 남겨야 할 기록이 더 많아. 너희의 기록은 볼 수 있을 때가 있을 거다. 웃으면서 말이다.”
“그래도… 한 번만 살짝, 사알짝 보여주세요오.”
덩치 좋은 앤이 애써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할아버지에게 졸랐다.
“콜록콜록. 얘야, 아까도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말로 해도 된다.”
친구들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웃음을 참았다.
“그럼 한 권만 살짝 보여줄까? 누구를 보여준담. 그래, 저 녀석이 재밌겠다.”
“네? 저요? 저, 왜요? 저는 안 봐도 돼요! 저는 이런 책이 있다고 쥐똥만큼도 안 믿었단 말이에요.”
“어허, 쥐똥이라니. 더 보고 싶어졌다.”
할아버지가 손가락을 튕겼다.

“음? 색깔이 의외구나. 어디 보자.”
할아버지 얼굴 앞에서 책장이 촤르륵 넘어갔다. “오호”, “흠”만 연발하던 할아버지는 책을 옆으로 밀어내고는 눈썹을 올려 테일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할아버지, 편하게 눈썹 내려주시면 안될까요? 저 되게 부담스럽거든요.”
“할아버지, 저희도 볼래요!”
“껄껄. 그래, 봐보렴.”
책이 아이들 앞으로 방향을 틀었다. 글씨가 반짝반짝 움직이면서 테일러의 과거가 영화처럼 그려졌다.

“테일러! 너 진짜!”
“테일러! 너 할아버지 할머니 도와드리다 늦는 거 맞구나!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네.”
“테일러! 멋져도 너무 멋진데!”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창피하니까.”
“사실이면 사실이라고 말했어야지.”
“믿지도 않았잖아. 뭐, 굳이 말할 것도 아니고. 아, 창피하다니까! 이제 그만 봐! 할아버지 말씀 못 들었어?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우리는 앞으로가 중요하다고!”
테일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할아버지가 손가락을 다시 튕겼다. 테일러의 책이 덮이고 어딘가로 날아가 꽂혔다.
“이제 6시 종을 칠 시간이 오고 있구나. 나는 종지기 임무를 하러 가야겠다. 너희도 이제 집에 가야지? 자, 내려가자.”
할아버지가 복도를 걸어나가 벽돌 하나를 누르자 문이 열렸다. 아이들은 책의 공간을 뒤돌아봤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새 문 앞까지 왔다.
“할아버지, 저희 다시 오면 여기 계실 거예요? 아니, 문 열어주실 거예요?”
한스가 물었다.
“글쎄다, 너희가 여기 또 올 일이 있을까? 여기서보다는 너희가 있는 곳에서 채워가야 할 이야기들이 많을 텐데.”
“그럼 할아버지.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요, 할아버지 연세는 대체 몇…?”
테일러였다.
“예끼, 나이 묻는 건 실례다. 나도 안 세본 지 오래다. 너희가 오래 안 살아봐서 모르겠지만 나이라는 것도 어느 순간 의미가 없어져.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지. 참, 줄 게 이것뿐이구나.”
할아버지는 쿠키와 초콜릿을 아이들 손에 한가득 쥐어줬다. 아이들은 한 명씩 할아버지에게 안겼다.
“비밀의 방이 또 열릴까요?”
도로시가 물었다.
“사실은 언제나 열려 있는지도 모르지.”
할아버지가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들은 문이 닫힐 때까지 할아버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처음 왔을 때처럼 나란히 서서 시계를 올려다봤다. 석양빛에 물든 종이 6시 정각에 맞춰 울렸다.
한스가 말했다.
“가자, 우리의 시간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