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엘 마을 중앙에 있는 시계탑의 종이 정오를 알렸다. 마을 사람들이 나른한 오후의 기지개를 켰다. 일하던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점심의 여유를 즐겼다. 복작해진 거리에 한 소년이 저 멀리 시계탑을 바라보며 인상을 구겼다.

분침이 10분을 넘어섰을 때, 누군가 팔로 소년의 목을 꽉 졸랐다.
“이얍! 나 왔다!”
“윽, 테일러! 시간 좀 제발 제대로 지켜. 너 때문에 맨날 나까지 지각이잖아.”
“미안, 미안. 그럼 친애하는 한스 님, 제가 사죄하는 마음으로 오늘의 중요한 약속 장소까지 무사히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테일러는 허리를 굽히고 멋지게 오른팔을 뻗었다. 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시계탑을 바라봤다. 시계탑에 달린 종이 햇빛에 반짝였다.
아리엘 마을 시계탑은 예로부터 ‘시간의 탑’이라고도 불렸다. 시간의 탑. 의미심장한 이름만큼이나 이 시계탑에 얽힌 이상한 전설이 있다.

“테일러, 네 기록 책에는 ‘지각에 아주 성실함’이라고 쓰여 있을 거야.”
“괜찮아! 애초에 그런 건 없으니까.”
“그래도 맨날 늦어서 이렇게 급하게 다니는 것보다 일찍 나와서 여유 있게 다니는 게 낫지 않아? 헥, 숨차.”
“운동 되고 좋은데? 너는 운동 부족이야. 내가 너를 위해 일부러 늦어주는 거라니까.”
“어우, 말을 말자.”
한스와 테일러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빵집 앞에 다다랐다. 창문 안을 슬쩍 보니 소녀 셋이 한쪽 테이블에 앉아 언짢은 표정으로 팬케이크를 자르고 있었다.
“흐흐, 우린 죽었다.”
“말은 똑바로 하자. 난 괜찮아, 네가 문제지.”
한스는 테일러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는 빵집 문을 열었다. 소녀 셋의 눈이 일제히 문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어서 앉으시지요, 만년 지각생 한스와 테일러.”
“클로에, 난 그 명단에서 빼줄래? 나는 테일러 때문에 늦는 거라고.”
“아이고, 고매하신 숙녀 여러분을 감히 기다리게 해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계신 할머니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어떻게 네 앞에만 매번 무거운 짐을 들고 가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들이 나타나실까?”
“역시, 앤은 예리해.”
테일러는 넉살 좋게 엄지를 치켰다. 앤은 답례로 팬케이크 접시 위에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양손에 쥐고 치켰다.

도로시는 언제나 단도직입적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스에게 집중됐다. 한스는 갑자기 자신 없이 웅얼거렸다. 소녀 셋은 얼굴을 찡그리고 한스 쪽으로 귀를 바짝 댔다. 주눅이 든 한스는 더 작게 웅얼거렸다. 소녀들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턱을 괴고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연신 두드리던 테일러가 보다 못해 외쳤다.
“시간의 탑!”
“뭐?”
“마을 중앙에 있는 시계탑 말이야. 거기 가서 비밀의 방을 찾고, 기록 책도 자기 두 눈으로 보고 싶대. 그런데 혼자 가기는 그렇고, 다 같이 가잔다.”
“뭐?”
시간의 탑은 마을 유적지라 마을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지겹게 소풍을 가는 곳이었다. 딱히 볼 것도, 신비로울 것도 없는 시계탑에 한스가 남다른 호기심을 가졌다는 것을 소꿉친구들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방학이잖아. 지금이 기회야. 시간이 언제 나겠어? 재미있을 거야, 추억도 될 거고. 우리 졸업하고 어른 되면 같이 얼굴 볼 시간도 없을걸? …휴, 솔직히 말하면 그 방, 그 책 꼭 한번 보고 싶어. 내가 아직도 애 같은 환상을 가진 거라면… 이제는 정신 차려야지.”
한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테일러, 너도 가기로 한 거야? 너는 시계탑에 제일 흥미 없잖아.”
클로에가 물었다.
“나야, 얘가 실망했을 때를 대비해야지. 나 말고 누가 이 순진한 아이를 다독여주겠어?”
“넌 굳이 안 가도 될 것 같다. 암튼 난 좋아, 딱히 할 것도 없고. 너희는?”
클로에가 앤과 도로시를 쳐다봤다. 한스도 고개를 들고 친구들을 바라봤다. 앤과 도로시는 어깨를 들어 올렸다. 괜찮다는 의미였다.
“다들 진짜 고마워!”
“오, 만장일치! 그럼 우리 모두는 한스의 모험에 가담하기로 결의합니다.”
테일러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탕탕 쳤다.
아이들은 다음 날 시계탑 앞에서 다시 모이기로 하고, 준비물을 짰다. 준비물이라고 해봤자 남자아이들이 가져올 램프와, 여자아이들이 챙겨오기로 한 간식이 전부였지만 모처럼 들떠 신나게 떠들었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시계탑이 오늘따라 더 커 보여. 기분 탓인가?”
“한스, 설마 겁먹은 건 아니지? 뭐가 무서워? 듬직한 내가 옆에 있는데. 하하하!”
테일러를 뺀 나머지 아이들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도로시가 문 쪽으로 앞장섰다.
“들어가자.”
“문이 열릴까? 옛날에는 종지기 할아버지가 열어주셨는데. 아, 돌아가셨을까? 그러고 보니 요즘은 애들이 시계탑으로 소풍 간다는 이야기를 못 들어봤어.”
“종지기 할아버지?”
“너희 기억 안 나? 왜, 시계탑 관리하던 할아버지!”
클로에는 친구들이 까맣게 잊은 기억을 끄집어냈다. 시계탑으로 소풍을 가면 시계탑 입구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그 할아버지였다. 새하얀 머리에, 하얀 수염이 길게 늘어졌는데 두꺼운 흰 눈썹까지 아래로 축 처져 있어서 눈을 본 적이 없다. 말소리도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아이들이 놀러 갈 때면 어두운 시계탑 안을 밝혀주고, 쿠키나 초콜릿을 아이들 손에 쥐여줬다. 시간이 맞으면 할아버지가 종 치는 모습도 봤다.
“열려 있어!”
시계탑 문을 슬쩍 밀어본 앤이 소리쳤다.
“희한하다. 내가 왔을 때마다 꿈쩍도 안 했는데.”
“한스, 너무 신기해하지 마. 쟤 힘이 보통 세야지. 문이 안 부서진 게 다행이야.”
정말 다행히도 앤은 테일러의 말을 듣지 못했다.

“위로 올라가자.”
한스가 천장을 바라보며 계단에 발을 올렸다. 나선형 계단은 벽을 따라 빙그르르 천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한스를 따라 계단으로 올라가려던 테일러는 이상한 기분에 계단 뒤쪽 모퉁이 구석에 램프를 비췄다.
“으아아아악!”
“뭐, 뭐야! 꺄아악!”
테일러와 여자아이들이 연달아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콜록콜록.”
힘없이 퍼지는 낯선 기침 소리가 테일러의 램프 빛을 받은 하얀 물체에서 새어 나왔다. 한스는 계단 위에서 실눈을 뜨고 하얀 물체를 유심히 살폈다.
“종지기 할아버지?”
물체가 아니라 사람, 기억 속 종지기 할아버지가 분명했다. 램프 빛을 정면으로 받아 음산하긴 하지만. 테일러는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앞을 똑바로 봤다.
“하하, 그러네. 할아버지시네. 아, 안녕하세요.”
여자아이들도 옷을 털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테일러, 네가 일을 낼 줄 알았지.”
“테일러, 너 진짜 듬직하구나.”
“테일러, 할아버지 얼굴 앞에서 램프 치워.”
테일러는 바로 램프를 내렸다. 한스가 계단에서 뛰어 내려왔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방학이라 오랜만에 시계탑에 놀러 왔는데, 문이 열려 있어서 그냥 들어왔어요. 저희 여기 좀 더 구경해도 될까요?”
할아버지는 미동이 없었다.

역시나 미동이 없었다.
“크게 말해야겠다. 여!기!구!경!해!도!돼!요!”
테일러가 할아버지 귀에 입을 바짝 대고 소리쳤다. 할아버지는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게 다였다. 이번에는 앤이 나섰다. 자신과 친구들을 두 팔로 가리키며 “저희요!”, 시계탑 천장을 찌를 듯이 있는 힘껏 검지로 가리키며 “저기 올라가도 돼요?”, 기도하듯 두 손을 얌전히 모아 얼굴 옆에 대고는 불쌍한 표정으로 “제발요.” 남자 못지않게 체격 좋은 앤의 몸짓은 누가 봐도 처절했다.
“그런데… 잘 보이시긴 하나?”
테일러의 말에 모두 맥이 빠졌다.
“콜록콜록.”
갑자기 할아버지가 벽 쪽으로 갔다. 탁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시계탑이 환해졌다. 벽에 걸린 등잔에 불이 올라온 것이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모두 꾸벅 인사했다. 클로에가 가방에서 무언가 주섬주섬 꺼냈다.
“할아버지, 저희 어릴 때 이런 거 많이 주셨잖아요. 이번에는 저희가 드릴게요. 사실 드릴 게 이것밖에 없긴 해요. 드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희 마음이니까 받아주세요.”
할아버지는 클로에가 준 사탕과 초콜릿을 살포시 쥐었다.
“그럼 저희 올라갔다 올게요.”
조심조심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계속 올라가면 천장이 있고 그 위로 다시 올라가면 종이 달려 있다. 어릴 때 종종 올라와봐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헥, 헥. 아, 숨차. 어떻게 옛날보다 올라오는 게 더 힘들지?”
“내가 말했잖아. 너 운동 부족이라고.”
“이리 와봐!”
도로시가 난간에 서서 친구들을 불렀다. 다섯은 난간에 쪼르르 붙었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우아,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경치 끝내주는데!”
“꼬꼬마 때는 종만 올려다봤지, 이런 게 보이는지 몰랐어.”
한참 동안 경치를 감상했다.
“…방 말이야. 역시 없나 봐.”
한스가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며 말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종 바로 아래쪽에 달린 커다란 시계는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