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정 고운 정 下

투둑, 툭. 쏴아아.
점심을 먹고 교실로 올라가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운동장에서 축구하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형, 여기. 오늘 비 온대.’
지호가 챙기라고 할 때 챙길걸.
종례 시간. 비는 더 세차게 땅을 때렸다. 아침에 걷었던 휴대폰을 받아 전원을 켜자마자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호연이었다.
「오빠, 나 방금 집 왔는데
지호 열이 엄청 나. 어떡해?
엄마한테는 걱정할까 봐 연락 못하겠어
문자 보면 바로 연락해.」
내 표정에 이상 기운을 감지한 진규가 휴대폰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지호 아프대?”
“…얘는 원래 틈만 나면 아파.”
“야, 보통 아프면 걱정 먼저 하지 않냐? 너는 동생들한테 정이 없어도 너~무 없어. 특히 지호, 지호가 얼마나 귀엽냐?”
“아프면 엄마가 더 애지중지해 주니까 꾀부리는 거야.”
나는 휴대폰 자판 화면을 빠르게 눌렀다.
「병원 데려가면 되잖아.
약 먹이고 재워.」

딩동댕동.
방과 후 보충수업을 마쳤다. 가방을 정리하는데 가방 깊숙이 뭔가가 보였다. 우산? 이상하다, 넣은 적 없는데…. 그래, 그때다. 내가 교복 갈아입을 때! 지호가 몰래 우산을 넣어놓은 것이다.
“비 진짜 많이 온다. 김정호, 너 우산 있냐? 없으면 나랑 같이 써.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이 형님이 의리 빼면 시체 아니냐.”
진규가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다. 아주 샛노란색 우산을.
“야, 남자 우산이 노란색이 뭐냐, 노란색이.”
“요즘도 남자 여자 색이 따로 있냐.”
“이건 너무 노랗잖아.”
“내 여동생이 선물해준 우산이거든요. 태클 걸지 마라. 우산 안 씌워준다.”
“나도 우산 있거든?”
나는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진규가 빈정거리며 웃었다.
“너야말로 취향이 독특한데? 이건 더 여자애 것 같지 않냐?”
아아, 이건 김호연 거다. 김지호, 챙겨줄 거면 잘 좀 챙겨주지. 빨간색에 하트가 빼곡히 박힌 우산이 뭐냐. 집에 가면 가만 안 둘 거다. 그런데 왜 이리 웃음이 나지?
“내 동생 지호 님이 챙겨준 우산이거든요? 태클 걸지 마라.”
나는 진규와 학교를 나와 형형색색의 우산을 쓴 아이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집 앞, 그제야 아프다던 지호가 생각났다. 집에 들어서자 호연은 나를 현관에 그대로 세워놓고 울먹거리며 상황을 설명했다.
“지호 비 맞고 와서 몸살 났나 봐. 다행히 지금은 열 내렸는데 아까는 펄펄 끓었어.”
“너는 우산 챙겼어?”
그 말에 호연이는 내 손에 들린 우산을 봤다. 순간 눈물 고인 눈이 무섭게 치켜떠졌다.
“아, 이게… 내가 가져가려고 한 게 아니라….”
호연이가 내 말이 마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아침에 지호가 우산 가져가라고 해서 챙기려고 했는데, 하! 이러니 내 우산이 있을 리 있나!”
호연은 또 나를 노려보고 속사포처럼 말했다.
“암튼! 급히 나오느라 다른 우산 챙기는 걸 깜박했어. 그런데 지호가 같이 학교 가면서 우산 챙겼냐고 묻는 거야. 까먹었다니까 자기는 학교 일찍 끝나서 필요 없을 거라고, 나한테 자기 우산 줬거든. 괜찮다고 해도 계속 가져가라길래 챙겼더니 이게 무슨 일이야, 딱 지호 학교 끝날 시간에 비 온 거 있지. 지호 아픈 거 다 나 때문이야.”
후, 너 때문만은 아니다. 호연을 진정시키고 방으로 들어갔다. 지호는 물수건을 이마에 올리고 누워 있다가 깼는지 나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김지호,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이 상황에 생뚱맞은 질문이란 것 잘 알고 있다. 미안해서 그렇다. 그런데 미안하다는 말은 못하겠다.
“아픈 애한테 질문이 뭐 그래?”
“넌 조용히 해라.”
이건 나만의 사과 방식이다. 다시 지호를 쳐다봤다.
“뭐… 치킨? 피자? 말만 해.”
지호가 화색이 돌아 벌떡 일어났다.
“와, 진짜? 먹고 싶은 거 다 사줘? 그럼 치킨! 아니, 피자! 음… 둘 다 먹을래!”
아빠가 준 남은 돈으로 치킨과 피자를 시켰다. 호연이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치킨은 거부하지 못했다.
“그런데 김호연. 너 지호 우산 쓰고 집까지 왔냐?”
“응.”
“그 안경 쓴 펭귄 그려진 어린이 우산 쓰고? 창피하지도 않냐?”
“우씨, 오빠가 내 우산 가져가서 그런 거잖아. 오빠야말로 하트 우산 쓰고 안 창피하냐?”
“전혀. 난 당당한데.”
“나도 안 창피하거든! 누가 준 우산인데. 그치, 지호야.”
호연이가 지호의 양 볼을 쓰다듬었다. 나도 질세라 지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호연이가 웬일이냐는 눈으로 쳐다봤지만 무시했다.
우리는 같이 야식을 먹고, 청소와 설거지까지 말끔히 끝내고서 잠자리에 들었다.

맛있는 냄새에 깼다. 김호연, 또 언제 일어나서 밥을 차린 거지?
“…엄마! 뭐야, 왜 집에 있어? 금요일에나 온다며.”
나도 모르게 엄마를 와락 안았다.
“어머, 얘 왜 이러니. 호호.”
엄마는 다 큰 아들의 포옹에 놀라면서도 싫은 눈치는 아니다.
“아빠 일이 일찍 끝났어. 할머니도 많이 좋아지셨고. 너희도 너무 보고 싶어서 하루 일찍 왔지.”
“아빠는?”
“업무 보고서 정리해야 한다고 벌써 나가셨어. 얼마 못 자서 피곤하실 거야. 그런데 내 새끼들!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청소도 싹 해놨더라? 진짜 예뻐 죽겠어.”
엄마 목소리에 깼는지 호연이와 지호도 방에서 나와 엄마 품으로 달려든다.
“오구, 다들 잘 있었어? 보고 싶어 혼났네. 정호가 잘 챙겨줬지?”
뜨끔했다. 내가 세탁기도 못 돌리고, 짜증만 냈다고 말하면 어쩌지.
“응, 우리 엄청 잘 챙겨줬어. 그치, 지호야?”
“맞아. 형아가 나 케이크도 사주고 치킨도 사주고 피자도 사줬어!”
놀라서 호연을 쳐다봤다. 호연이 엄마 몰래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 옆에서 지호도 되지도 않는 윙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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