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은 없었고 ‘사랑’이 있었다

때는 초등학교 2학년, 그러니까 아홉 살 때였다. 한번은 학교에서 특이한 주제로 수업을 했는데, ‘모든 사람은 태어나고 죽음에 이른다’는 주제였다. 아홉 살이 배우기에는 심오한 주제였다. ‘죽음’에 대해 알지 못했던 아이들이 몇몇 있었고, 나도 그중에 포함되었다. 선생님은 “지금 너희가 듣기에는 어려운 말이지만 죽음은 언제 다가올지 모른다”는 아리송한 말을 하셨다.
수업은 다음 시간까지 이어졌다. 선생님은 프레젠테이션으로 몇 장의 사진을 보여주셨다.
“이 사진에서 뭐가 보이니?”
“아기랑 할머니가 보여요.”
“이 둘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아기는 어린데 할머니는 나이가 많아요.”
화면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아기가 어린이에서 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고, 나이 많은 할머니가 되어 죽음을 맞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그림이었다.
“이 그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아기가 크는 과정인 것 같아요.”
“맞아. 너희 부모님도 처음에는 아기였고, 너희 같은 어린아이였다가 시간이 흘러 너희의 엄마 아빠가 되신 거야. 할아버지 할머니도 이 과정을 거쳐 너희 부모님들을 낳아주신 거고. 어른이 되는 과정은 누구나 거쳐. 하지만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선택이지. 너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건 힘들 줄 알면서도 너희를 만나기 위해 엄마 아빠가 어려운 선택을 하셨다는 뜻이야.”
그때 한 친구가 손을 들고 말했다.
“선생님, 저는 엄마 아빠가 처음부터 엄마 아빠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네요?”
이렇게 생각한 친구는 아마 한두 명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도 우리 엄마 아빠는 태어날 때부터 나의 엄마 아빠였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처음부터 우리 엄마 아빠의 엄마 아빠였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날 저녁, 잠시 외출한 엄마를 현관 앞에서 기다리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할머니가 되어 죽음을 맞이한 그림이 떠올랐다. 내가 어른이 되면 엄마는 할머니가 되고, 언젠가는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울먹였다. 마침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엄마, 엄마도 나중에 할머니처럼 머리가 하얘지면 하늘나라에 가요?”
엄마는 뭔가 생각하더니 내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엄마도 나중에 나이 먹으면 할머니처럼 머리가 하얘지긴 하겠지만 엄마는 아직 하늘나라에 안 갔으니까 울지 마. 아홉 살이 벌써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놀랐네.”
엄마는 나를 꽉 안아주었고 나는 한참을 훌쩍였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선생님이 말하고 싶었던 수업의 핵심은 ‘모든 사람은 태어나고 죽는다’가 아닌,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받게 되는 부모님의 사랑이었다. 이후로 나는 세상에 그냥 존재하는 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 역시 ‘그냥’ 존재하지 않았고 부모님의 희생이 담긴 ‘사랑’으로 태어났으니까.
부모님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사랑을 주고도 보답을 바라거나 값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랑으로 나를 존재케 해준 부모님께 크게 외쳐본다. 감사하다고, 나도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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