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아이들이 교문을 빠져나간 시각, 한 아이가 박 선생을 찾아왔다. 정원이었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떨리는 몸을 애써 누르는 정원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당황한 박 선생은 정원을 자신의 옆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혔다. 정원은 연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한참 만에 겨우 입술을 뗐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어요. 지영이가… 이유 없이 저를 밀치고, 제 가방에 우유를 쏟고, 책을 찢어놓은 적도 있어요. 친했던 애들도 이제는 저한테 아는 척 안 해요.”
박 선생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원은 성격이 밝고, 리더십이 강해서 반장까지 하고 있다. 다른 선생님들도 예뻐하는 아이다. 그런데 왕따라니.
정원은 큰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박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님,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 전 이제 어떡하면 좋죠?”
박 선생은 정원을 가만히 안아줬다.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야. 말하기 힘들었을 텐데, 선생님한테 말해줘서 고마워. 선생님이 도와줄게. 선생님하고 천천히 해결해 보자.”
정원은 박 선생의 품에 안겨 어깨를 들썩였다.
상처받은 이는 상처가 아물 때까지 약을 발라주고, 덧나지 않도록 지켜봐 줘야 한다. 그러나 정원이 받은 마음의 상처는 정원만 달래준다고 해서 아물 상처가 아니었다. 똑같은 상처가 재발되지 않으려면 다른 아이들의 마음까지도 돌아봐야 한다.
다음 날, 박 선생은 쉬는 시간마다 반 아이들을 유심히 지켜봤다. 정원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친구들의 시선을 회피하려는 듯 엎드려 있는 정원의 등 뒤로 차가운 눈초리가 꽂히기도 했다.
박 선생은 궁금했다. 정원이 순식간에 혼자가 된 이유가.
점심시간, 박 선생은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불렀다. 먼저 정원과 가장 친했던 주희를 불렀다.
“주희야, 학교 생활하는 데 어려운 점은 없니?”
“네. 그런데 정원이 때문에 조금 힘들어요.”
“정원이 때문에 힘들다니, 왜?”
“뒤에서 저를 욕하고 다닌대요. 제가 우리 언니만 믿고 센 척한다고요. 저 안 그랬거든요. 걔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니?”
“지영이가 들었대요. 정원이가 제 이야기하는 거.”
주희는 정원에게 많이 실망한 듯했다. 다음으로 훈석이를 불렀다. 부반장인 훈석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훈석아, 요즘 반 분위기는 어때? 괜찮아?”
“남자 애들은 좋은데 여자 애들은 조금 이상해요.”
“분위기가 안 좋니?”
“안 좋다기보다 여자 애들끼리 편 가르고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지영이.”
“지영이?”
“지나가다 몇 번 들었는데 지영이가 자꾸 애들한테 정원이 안 좋은 이야기만 하더라고요. 정원이 부모님이 선생님들한테 아부한다거나, 정원이가 앞에서 웃고 뒤에서는 친구들을 욕하고 다닌다거나. 애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해요.”
박 선생은 머리에 무언가로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반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는다고는 했지만, 정작 아이들도 이미 다 아는 사실마저 몰랐던 무감각한 선생이라며 속으로 자책했다. 아이들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정원의 상처를 위로해 주지 못하고, 지영의 잘못된 행동도 바로잡아 주지 못한 것이다.
박 선생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깊이 생각하던 박 선생은 갑자기 무릎을 탁 치고는 학급의 모든 학부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원이 엄마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정원이 어머니 되시죠? 다름이 아니라 금요일 방과 후에 교실에서 전체 학부모 상담을 하려고 하는데, 그전에 먼저 뵈었으면 해서요. …예, 그때 뵙겠습니다.”
금요일 오후. 박 선생은 빈 수업 시간을 이용해 정원의 부모를 만났다. 정원이 왕따를 당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정원의 부모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래서… 우리 정원이가 요새 통 말이 없었군요.”
정원의 엄마는 눈물을 흘렸다.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박 선생이 입을 열었다.
“저는 무조건 벌을 주는 것이 해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벌을 주는 대신 아이들 스스로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을 수 있도록 지도할 거예요. 어머님,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정원이도 다시 밝아질 거예요.”
방과 후, 학부모들이 하나둘 비어 있던 교실을 채웠다. 학부모가 모두 모이자, 박 선생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학부모님들, 요새 왕따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거 아시죠? 내 아이와 관계없는 이야기이길 바라셨겠지만, 제 노력이 부족했나 봅니다. 최근 아이들 사이에서 왕따 문제가 생겼습니다. 먼저 제 불찰에 대해 책임을 지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학부모들이 웅성댔고, 곳곳에서 옅은 신음 소리가 터졌다.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이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 잘 몰라요. 왕따를 당하는 아이의 마음에 생긴 상처를 조금이라도 느껴봐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서 프로젝트를 준비했어요. 그 전에 먼저 부모님들의 동의를 구하려고 합니다. 더 이상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신다면 학부모님들도 꼭 함께 도와주세요. 어떤 내용이냐면….”
박 선생이 내놓은 대책에 학부모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개중에는 얼굴을 구기며 항의하는 학부모들도 있었다. 하지만 소중한 중학교 시절이 아이들에게 행복한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지 않느냐는 박 선생의 간절한 부탁에 모든 학부모가 동의했다.
“뭐예요, 선생님?”
“우리 반에서 한 달 동안 해볼 프로젝트예요.”
박 선생은 미리 준비한 제비를 교탁 위에 올렸다.
“매일 제비를 뽑아서 끝에 빨간색 줄이 그어진 제비를 뽑은 한 명이 하루 동안 외톨이가 되는 거예요. 외톨이가 된 사람에게는 절대 말을 걸어도, 아무런 도움을 줘서도 안 돼요. 그날 종례 시간이 되어야 외톨이 생활도 끝납니다.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는 친구를 더 이상 외톨이로 만들면 안 되겠죠? 한 번 외톨이로 뽑힌 사람은 제비를 안 뽑아도 돼요.”
“네? 왕따를 하라고요?”
“저희 엄마가 알면 난리 날 텐데….”
“이게 무슨 프로젝트예요!”
아이들은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절규했다.
그때 대준이 손을 번쩍 들었다. 대준은 반에서 키가 제일 크고, 반 분위기를 살리는 개구쟁이다.
“이거 왜 하는 건데요?”
“친구들 사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겠지만, 내가 직접 외톨이가 돼서 왕따가 되는 마음을 느껴보게 하려고 하는 거야.”
대준을 바라보고 대답하던 박 선생은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선생님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여러분이 혼자 힘들어 하는 친구에게 ‘도와줄게’, ‘친구가 되어줄게’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여러분 곁에 있는 친구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았으면 해요. 그럼 우리 주위에 외톨이가 되는 친구는 없게죠?”
“그럼 제가 먼저 외톨이 해볼래요!”
“오―.”
대준의 용기에 아이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첫 번째 외톨이는 대준. 대준은 외톨이가 됐지만 개의치 않고 아이들에게 장난치며 재미있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박 선생이 몇 번 주의를 주고 나서야 아이들은 대준이 오면 억지로 등을 휙 돌렸다. 대준은 친구들에게 계속 말을 걸었지만 외면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점점 조용해졌다. 대준은 말없이 자리에 앉아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종례 시간, 박 선생은 아이들에게 물었다.
“대준이가 오늘의 외톨이였죠? 친구를 외톨이로 만드는 기분이 어땠나요?”
“도와주고 싶은데 도와줄 수 없어서 미안했어요.”
“대준이가 조용하니까 하루 종일 재미없었어요.”
“대준이는 절대 왕따 당하면 안 돼요!”
대준의 얼굴이 빨개졌다.
“대준이는 기분이 어땠니?”
“…저는 혼자 있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오늘 엄청 이상했어요. 그리고 친한 친구들하고만 어울려 지냈는데 다른 아이들이 저를 좋게 봐주는지 몰랐어요. 뒤에서 욕한 적 많은데 친구들에게 미안해요.”
박 선생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이 준비한 프로젝트, 내일부터 쭉 진행해도 괜찮을까요?”
아이들의 반응은 의외로 괜찮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