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삐빅. 삑삑삑삑. 철컥.
“아들 왔어? 밥은?”
엄마는 커다란 트렁크 2개를 거실로 옮기고 있었다.
“먹었어. 어디 가?”
“내일 아빠 출장 가시잖아. 그리고….”
엄마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늘였다.
“엄마도 시골에 내려갈 거야. 할머니 몸이 많이 안 좋아지셔서 가보려고 했는데 마침 아빠 출장지가 할머니 댁 근처더라고.”
“언제 오는데?”
“금요일 저녁에나 올 것 같아. 엄마 없으니까 정호가 동생들 좀 돌봐줘.”
‘동생들’이란 이제 초등학교 들어간 막둥이 김지호, 두 살이나 어리면서 나랑 맞먹으려 하는 김호연이다. 하루도 아니고 5일씩이나 걔네를 돌보라고? 짜증이 확 밀려왔다.
“고3이 무슨 시간이 있다고.”
“미안해. 밥은 호연이한테 부탁했어. 호연이가 요리는 잘하잖니. 너는 지호 알림장이랑 준비물만 확인해 주면 돼. 그나저나 지호가 엄마 찾을까 봐 걱정이다.”
엄마는 지호가 잠들어 있는 안방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아, 나 힘든 거는 안 보여?”
“이번만 부탁할게. 응?”
나는 방문을 일부러 쾅 닫았다.
다음 날, 엄마가 나를 평소보다 일찍 깨웠다.
“정호야, 아침밥 차려놨어. 동생들 깨워서 같이 먹어. 지호 학교는 호연이가 데려다줄 거야. 참, 수요일이 지호 생일인 거 알지? 그날 엄마 아빠가 아무것도 못해주니까 네가 잘 챙겨주고. 엄마 간다!”
엄마는 잠이 덜 깬 나를 붙잡고 이 말 저 말 쏟아부었다. 아빠는 만 원짜리를 두둑이 쥐어주고는 내 어깨를 두 번 두드리며 비장하게 말했다.
“정호만 믿는다.”
엄마 아빠가 나간 후, 집에 정적이 감돌았다.
“후….”
동생들 아침밥을 챙겨야 한다. 모레는 김지호 생일까지. 생각만 해도 귀찮다.
일단 호연과 지호를 깨워 밥 먹으라고 말하고, 나는 학교 갈 채비를 했다. 가방을 챙기는데 소파에 있는 지호의 작은 가방이 보였다.
“진짜 귀찮네.”
지호 가방에서 알림장을 꺼냈다. 알림장에는 또박또박한 글씨로 준비물이 적혀 있었다. 가방 안을 살폈다.
“알아서 잘 챙겼네, 뭐.”
집을 나서기 전, 호연이와 지호를 현관 앞으로 불렀다. 최종 지령을 위해서다.
“학교랑 학원 끝나면 어디 가지 말고 바로 집으로 와. 숙제 있으면 숙제하고. 나는 늦으니까 밥때 되면 너희끼리 알아서 챙겨 먹어. 나 간다.”
삐빅. 삑삑삑삑. 철컥.
“오빠 왔어? 밥은?”
평소 같으면 엄마가 하는 말을 호연이가 한다.
“네가 웬일로 설거지를 하냐.”
“엄마가 없잖아. 왕 같은 고3한테 시킬 수도 없고. 나라도 해야지.”
고등학생 됐다고 철들었나.
화장실에 가려다 이상 물체가 포착됐다. 빨래통에 쌓인 빨래다. 나는 여태 빨래가 수북이 쌓인 걸 본 적 없다. 집에 오면 항상 빨래통은 비워져 있었고, 마른 빨래는 잘 개어져 서랍장에 정리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어제 엄마가 짐 싸느라 빨래를 못했나 보다.
빨래통을 들고 베란다로 나가 세탁기에 빨래를 쏟아 넣었다. 그런데… 세탁기는 어떻게 돌리지?
“김호연, 너 빨래할 줄 아냐?”
“열아홉이나 먹고 빨래도 못해? 빨래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되잖아.”
“그럼 잘 아는 네가 하시든가.”
“나 지금 설거지하는 거 안 보여?”
지호가 베란다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나 어떻게 하는지 아는데…. 엄마랑 빨래한 적 많아.”
쪼끄만 게 뭘 안다고 나서는지.
“나도 알아! 잠깐 까먹어서 그러는 거야.”
호연이 비웃었다.
“웃기시네. 지호야, 누나가 설거지하고 있어서 그런데 누나 대신 세탁기 좀 돌려줄래?”
지호는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와 자기 키만 한 세탁기 앞에 섰다. 지호가 까치발 하고 세탁기 안에 세제를 넣고 버튼을 꾹꾹 누르자 물이 차올랐다.
“잘 아는 너희 둘이 알아서 해라. 난 자련다.”

늦잠을 자버렸다. 엄마가 없으니까 늦게 일어나도 깨워줄 사람이 없다. 화장실로 달려가 부랴부랴 씻고 나오니 호연이가 화장실 앞에서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봤다.
“치사하게 진짜 혼자 자버리냐? 나는 어제 늦게까지 지호랑 빨래 다 널고 잤어.”
아침부터 열 내기 싫다.
“비켜. 너랑 싸울 시간 없어.”
“빨래 하나 못해서 어린애한테 시키기나 하고. 참 좋은 형이다.”
“그만하라고 했다.”
“잘한 것도 없으면서 왜 성질이야, 성질은.”
“조용히 안 해!”
결국 큰소리를 쳤다. 호연이는 눈을 부릅떴다. 역시 얘는 소리친다고 굽힐 애가 아니다.
“내일 지호 생일인 건 알아? 이따 장 보게 돈 줘. 아빠한테 받았다며. 밤에 오면서 케이크 사 오고.”
학원이 끝나고 친구들과 한참 걷고 있는데 옆에 있던 진규가 말했다.
“야, 너 오늘 케이크 사야 된다고 하지 않았냐?”
“아, 맞다!”
“너 나 없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네, 네. 감사합니다, 형님.”
진규 아니었으면 그대로 집에 들어가서 호연이랑 또 대판 싸울 뻔했다. 곧장 빵집으로 갔다. 케이크가 딱 1개 남아 있었다.
“이거 주세요. 초는 작은 거 8개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호연이는 내 손부터 살폈다. 자신의 손에는 칼을 쥔 채로.
“케이크 이거밖에 없었어? 예쁜 케이크 많은데.”
“이 밤에 케이크가 남아 있던 것만으로 고마운 줄 알아. 그리고 칼 좀 치워. 뭐 만드냐?”
“반찬. 내일 아침에 지호 생일상 차려주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지.”
김호연은 지호한테 하는 것의 반만이라도 나한테 잘했으면 좋겠다. 왜 오빠인 나는 무시하면서 지호라면 깜빡 죽는 걸까.
“넌 집에 언제 들어왔길래 음식까지 만들고 있냐?”
“학원 뺐어. 부모님 집에 안 계셔서 동생 봐야 한다니까 선생님이 알겠대. 이번 주는 집에 일찍 올 거야.”
“밖에서 애들하고 돌아다니는 건 아니고?”
“내가 오빠냐? 안 도와주고 시비 걸 거면 들어가서 잠이나 자!”
맛있는 냄새에 눈을 떴다. 식탁에는 갖가지 반찬과 미역국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
“이게 다 뭐래?”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했지. 오빠가 지호 좀 깨워줘.”
지호를 깨우러 방에 들어갔다. 지호는 세상 근심 없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귀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내가 치열한 10대의 마지막을 보낼 때, 얘는 엄마 아빠와 누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구나.
“김지호, 일어나.”
꿈쩍도 안 한다.
“야, 얼른 일어나!”
큰 소리에 깜짝 놀란 지호가 번쩍 눈을 떴다.
“정신 차리고 나가서 밥 먹어.”
지호는 눈을 비비며 주방으로 갔다.
“아니, 애를 얌전히 깨우면 되지 왜 소리를 지른대.”
호연이가 초가 꽂힌 케이크를 상에 올리며 한 소리 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케이크를 발견한 지호가 배시시 웃었다. 애는 애다.
호연이는 자기가 더 신나서 초에 불을 붙이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정말 마음에 안 든다. 나는 대충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고 일어났다. 지호가 방까지 졸졸 나를 따라 들어오더니 우산을 내밀었다.
“형, 여기. 오늘 비 온대.”
“날씨가 이렇게 화창한데 뭔 비야. 짐밖에 안 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지호를 무시하고 뒤돌아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잽싸게 집을 나왔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