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골짜기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마음씨가 곱고 너그러워 ‘어진골’이라 불리는 마을입니다.
“가갸거겨고교구규….”
마을 한구석에서는 아이들이 글 읽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푸른색 기와가 돋보이는 훈민정음 서당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서당에서는 한복을 차려입은 마을 아이들이 한글을 배우지요.
오늘은 웬일로 서당이 조용합니다. 아이들이 대청에 나와 붓글씨를 쓰고 있군요. 그런데 한 아이가 글씨를 이상하게 쓰고 있습니다. 자음과 모음이 제각각 떨어져 제대로 읽을 수가 없네요. 훈장님이 아이가 쓴 글을 보고 호통칩니다.
“대체 무엇을 쓰는 게야?”
아이는 놀라서 붓을 놓칩니다.
“후, 훈장님. 이렇게 쓰려고 한 게 아닌데, 글씨가 마음대로 써졌어요.”
화선지 위에 아이의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화선지의 글씨가 눈물에 번집니다.
“나한테서 떨어져! 나까지 젖겠어.”
“나라고 너랑 붙고 싶은 줄 알아? 자리가 좁아서 움직일 수 없단 말이야.”
누구 목소리일까요? 아, 화선지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한글 자음과 모음이 싸우고 있네요.
“이제 알았어? 내가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있는 거야.”
“쳇, 웃기시네.”
한글들이 싸우는 소리에 아이 옆에 조용히 있던 벼루가 갸우뚱거립니다.
“글쓰기 시간에 왜 이렇게 소란스럽지?”
붓과 먹이 혀를 차며 말합니다.
“아이가 쓴 글 좀 읽어 봐. 이게 한글이야?”
“글쎄, 자음과 모음이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우기다가 그런 모양이더라고.”
“이제는 아예 붙어 있으려고 하지를 않아.”
“이대로 두었다가는 큰일 날 것 같은데….”
벼루는 한글들이 걱정입니다. 서당 아이들이 붓글씨 연습을 끝내고 돌아간 뒤에도 벼루는 한글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벼루는 갑자기 붓과 먹을 부릅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우리가 자음과 모음의 이야기를 듣고 누가 더 뛰어난지 가려주자.”
“오, 그거 좋다.”
벼루, 붓, 먹은 한글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읍니다.
“왜 부른 건데?”
“너희 한글들은 자음파와 모음파 중에 누가 더 우월한지 가리고 싶지? 그래서 회의를 열려고 하거든. 우리가 너희 의견을 듣고 다수결로 판결할게.”
자음과 모음이 웅성웅성합니다. 기역이 팔짱을 끼며 말합니다.
“뭐, 좋아. 결과는 보나마나 자음이겠지만.”
“무슨 소리! 저게 콧대만 높아가지고.”
욱하는 성격인 우가 기역 위로 올라가 발끈합니다.
“악! 뭐하는 거야!”
“그만, 그만.”
벼루가 우와 기역을 떨어뜨립니다.
“지금 빨리 회의를 시작하는 게 좋겠어.”
“그래, 이대로 두면 더 시끄러워질 거야.”
붓과 먹의 말을 듣고, 벼루는 곧장 회의를 시작합니다.
“먼저 각각 자신의 파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말해 봐.”
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합니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는 자음을 부축하잖아. 무거운 자음들을 받쳐주고 옆에서 거들어주느라 몸도 약해지고 홀쭉해졌어. 우리의 희생으로 한글의 구조가 완성되니 모음이 당연 최고지!”
“자음이 아래에서 받쳐주는 건 생각 안 하나?”
“야, 키읔.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네가 우리 받쳐주는 건 거의 본 적이 없거든? 암튼 우리 모음이 더 많이 희생하는 건 사실이잖아.”
“맞아. 그리고 우리 모음은 세종대왕님이 하늘의 둥근 모양(•)과, 땅의 평평한 모양(ㅡ), 사람이 서 있는 모양(ㅣ)을 본 따서 만드셨어. 천지인(天地人)의 모양이 깃든 우리 모음을 누가 감히 따라오겠어?”
어의 말에 먹과 붓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자음의 막내 히읗이 손을 번쩍 들고 말합니다.
“형 누나 들, 글자 쓸 때 자음보다 모음 먼저 쓰는 거 본 적 있어요?”
모음들은 한 대 크게 맞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팔짱을 낍니다. 잠시 후, 오가 큰 목소리로 말합니다.
“자음 중에 혼자서 자기 이름 말할 수 있는 글자 있으면 나와 봐. 우리 모음은 혼자서도 소리 낼 수 있어. 너네가 최고라면 우리 도움 없이 이름을 말해보던가.”
자음과 모음이 자신들의 장점을 내세우느라 점점 언성이 높아집니다.
“조용! 너희 의견 잘 들었어. 아무래도 오늘은 판결을 내리기 어렵겠어. 내일 다시 회의를 열자.”
벼루는 한글들을 진정시키고 회의를 끝냈습니다. 자음과 모음은 못마땅한 얼굴로 돌아갑니다.
깊은 밤, 자음들이 달빛 아래 몰래 모였습니다. 이응이 자음들을 감싸고 속삭입니다.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어. 다들 서당에서 가장 존경받는 먹 장로님과 붓 장로님은 알고 있지? 장로님들께 가서 지혜를 구하자.”
먹 장로와 붓 장로는, 어진골의 장인들이 정성스레 만들어 훈민정음 서당에 선물한 가장 오래된 먹과 붓입니다. 훈장님 방 탁상 위에 있지요.
다음 날, 자음들은 회의가 열리기 전에 장로들을 찾아갔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