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메이커 갖고 싶다!


4월 6일 월요일

개학한 지 한 달도 넘었는데 내 몸은 아직도 개학한 걸 모르는 것 같다. 춘곤증인 건지, 수업 시간마다 졸려서 기절하기 직전이다. 짝꿍 소희가 나 깨우느라 고생이다.
학교 끝나고 소희랑 주영이랑 분식집에 갔다. 소희가 한 턱 쐈다…기보다 분식집 사장님이 소희 엄마였다. 배부르게 실컷 먹었다. 아이 행복해.♡


4월 8일 수요일

다다음 주에 소풍을 간다. 다들 소풍 때 뭐 입을지, 뭐 먹을지 회의(?)하느라 하루 종일 시끄러웠다. 그런데 영 거슬리는 애들이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신 유행하는 메이커로 도배하고 다니는 ‘메이커족’이다. 걔네들은 소풍 때, 새로 나온 신상으로 차려입을 거란다.
나도 작년 신상 운동화 있는데. 지금 보니까 취급도 못 받겠다. 하여간 대충 입었다간 놀림받을 게 뻔하다. 엄마한테 사달라고 해도 안 사주겠지? 힝, 난 뭘 입지?


4월 9일 목요일

오늘은 소희한테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소희가 요새 애들이 갖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가방을 메고 왔다. 메이커족 애들은 소희한테 와서 어디서 샀냐고 난리였다. 전에는 눈길도 안 주더니….
사실 소희가 부러웠다. 소희처럼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면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가 될 것 같다. 나도 메이커 갖고 싶다!


4월 12일 일요일

엄마가 이모네 다녀오더니 사촌 언니가 입던 옷을 얻어왔다. 내가 애도 아니고 절대 물려 입기 싫다. 옛날 디자인에 후줄근하더만.
엄마한테 메이커 신발 하나만 사달라고 했다. 예상했지만 안 된다고 해서 짜증났다. 아빠는 사주겠지 싶어서 졸랐다. 아빠도 안 된다고 했다. 홧김에 내가 왕따 돼도 좋냐며 다른 부모님들은 메이커 잘만 사준다고 큰소리쳤다.
대체 왜 그랬을까, 지금 폭풍 후회 중이다. 나한테 너무 화가 난다. 엄마 아빠 잘못도 아닌데 말이다. 에라이,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4월 13일 월요일

소희가 이상하다. 말도 안 걸고, 쉬는 시간에는 메이커족이랑만 이야기하더니 학교 끝나고도 걔네들이랑 갔다. 주영이도 당황했다. 집에 오는 길에 둘이서 소희 이야기를 하다 옷 이야기가 나왔다. 주영이도 메이커 옷을 사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풀 겸 수요일에 쇼핑하기로 했다.
비상금 털어야겠다.ㅠㅠ


4월 15일 수요일

주영이랑 메이커 매장에 갔다. 진짜 비쌌다. 내 비상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가격 대비 괜찮은 바지만 하나 샀다.
바지 사고 돌아오다가 메이커 매장 안에 있는 소희와 소희 엄마를 봤다. 신발 사달라고 조르는 것 같았다. 그 신발, 주영이랑 봤었던 거다. 예뻤지만 엄청 비쌌다. 소희네 엄마는 매일 쉬지 않고 힘들게 일하시던데…. 이게 부모님의 등골을 휘게 한다는, 그 유명한 ‘등골 브레이커’인가?


4월 19일 일요일

엄마 아빠가 친구분 만나고 오는 길에, 내가 사달라고 노래를 부르던 신발을 사 온다고 해서 완전 신났었다. 모처럼 기분 내서 착한 딸 노릇 좀 하려고 빨래를 갰다. 그러다 엉엉 울었다.
아빠 양말이 죄다 해져 있고, 러닝셔츠는 늘어날 대로 늘어나 있었다. 엄마 옷도 보풀이 심했다. 소희한테 뭐라 할 처지가 아니었다. 나도 부모님이 힘들게 일해서 아낀 돈으로 메이커 사달라고 졸랐으니.
엄마 아빠가 신발을 사 왔을 때 별로 기쁘지 않았다. 하지만 엄청 좋은 척했다. 살짝 가격표를 봤다. 장난이 아니었다. 엄마 아빠는 제대로 된 옷도 안 사 입으면서 나는 어떻게 사주나 싶다. 내 신발 사지 말고 엄마 아빠 옷이나 한 벌 사라고 할걸.


4월 20일 월요일

어제 제대로 못 잤다. 신발 때문이다. 나는 밤샘 고민 끝에 신발을 환불하기로 결심했다. 엄마한테는 사이즈가 안 맞아서 교환하겠다고 하고, 카드와 영수증을 받아냈다. 훗, 난 머리가 좋아.
학교 끝나자마자 매장에 가서 신발을 환불했다. 개운하다. 엄마 아빠한테 말로 설명하기 민망해서 문자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죄송하다고 했다.
메이커가 뭐라고 엄마 아빠를 힘들게 했는지 모르겠다. 아, 오늘은 편하게 잘 수 있겠다~.


4월 21일 화요일

소희랑 화해했다. 싸운 건 아니니까 화해라고 하기도 뭣하다.
소희는 다들 메이커, 메이커 해서 메이커만 있으면 좋을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좋은 것도 그때뿐, 주영이랑 나랑도 멀어지고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면서 마음이 불편했다며 울었다. 나도 그 마음이 이해됐다.
우리 셋은 오랜만에 소희네 분식집에 갔다. 아줌마가 반겨주셔서 기분 좋았다. 소희가 정신 차렸으니 아줌마도 덜 힘드시겠지? 에고, 나나 잘하자.
암튼 소희 엄마표 떡볶이는 진짜 맛있다.


4월 23일 목요일

내일 소풍 간다고 엄마랑 장을 봤다. 엄마는 도시락을 넉넉하게 싸준다고 애들하고 나눠 먹으라고 했다.
아까 엄마가 젊었을 때 사진을 보여줬다. 그때 유행하던 최신 옷이라는데 진짜 웃겼다. 철 지나면 다 그렇게 되나 보다. 사진 속 엄마는 정말 예뻤다. 엄마가 많이 늙었다고 속상해 하길래 엄마 얼굴에 팩을 붙여줬다.
엄마, 지금도 예뻐.♡


4월 24일 금요일

오늘 소풍 갔다가 감동받았다. 엄마가 도시락과 함께 써준 쪽지 때문이다.
「우리 딸은 메이커보다 값지다! 엄마 마음 알지? 친구들이랑 나눠 먹어^^」
엄마의 음식 솜씨는 최고였다. 정작 나는 애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많이 못 먹었다. 흑.
메이커족들은 예정대로 메이커로 쫙 빼입고 왔다. 반 단체 사진 찍을 때, 선생님이 단체복 입고 왔냐고 하니까 머쓱해했다. 하하, 너희도 부모님 생각해서 빨리 정신 차려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유행에 쉽게 휩쓸리고, 겉모습으로 친구를 사귀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친구를 사귀는 데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유행은 한때뿐이다. 내 주변에는 지나면 변해버리는 유행보다 소중한 것이 훨씬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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