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으로 점철된 그녀, 삶의 희망을 찾다

홍영숙 씨는 1961년 전라남도 광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제일 가난했던 시절, 그녀는 여자로 태어나 궁핍과 차별을 몸소 겪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가난한 가정 형편에도 매사에 밝고 활발했다. 운동과 노래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특히 달리기 실력이 좋아서 운동회 때마다 공책, 연필 등 학용품을 싹쓸이했고, 그녀 덕에 동생들까지 학용품을 챙길 수 있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밭일과 새참 만들기, 장작 패기가 일상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바로 공장 일을 시작했다. 없는 살림에 형제자매까지 많아 6남매 중 장녀였던 그녀가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제약회사를 시작으로 신발 공장, 가전제품 공장, 수출 공장단지 등 여러 곳을 거치며 일했다. 공장 내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교에서 공부했다. 힘들기는 했지만 또래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재미있었다. 힘든 시대에 내던져졌을지라도 10대의 풋풋함과 활기가 있었던 것이다.
20대로 접어든 그녀는 결혼을 했다. 그해에 딸 문덕애 씨가 태어났고, 2년 뒤 아들 문성조 씨가 태어났다. 그녀는 도배 인테리어점과 커튼 가게를 병행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온종일 서서 벽에 벽지를 붙이고 못을 박았다. 힘들어도 버틸 수 있던 힘은 오로지 집에 있는 아이들이었다. 10대 때는 가족을 위해서, 20대에는 자녀를 위해 일하며 꽃 같은 청춘을 보낸 것이다.
그녀 나이 마흔하나에 문채빈 군이 태어났다. IMF 외환위기 후 가세가 기울어 중학생 첫째, 둘째를 먹여 살리려 낮에는 커튼 가게, 밤에는 다시 공장에 나가 일하던 중이었다. 늦둥이까지 태어나 그녀는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
그녀의 삶에서 편안했다고 말할 만한 시기는 없었다. 10대 때부터 언제나 일을 벗 삼은 인생이었다. 그중에서도 2007년은 그녀에게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전라도 광주에서 인천으로 이사해 모든 삶의 기반을 다시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학생 큰딸의 자취방에 일곱 살 막내를 맡기고 밤낮없이 일했다. 몇 달 후, 작은 반지하 방을 얻어 막내를 데려와 키웠다. 그러나 살인적인 일과가 계속됐다. 낮에는 식당에서 일했고 잠시 집에 들러 막내의 밥상을 차렸다. 그리고 다시 공장으로 나갔다. 하루에 자는 시간은 3~4시간. 과로로 쓰러진 적도 있었다. 그녀의 희생으로 문채빈 군은 햇살이 비취는 번듯한 집으로 이사했고, 밥 한 번 굶지 않고 학교에 다녔다. 만약 막내아들이 없었다면 그녀는 그렇게 죽을 만큼 힘든 일을 하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어릴 적 꿈은 군인이었다. 주체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이 멋져 보여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꿈을 위한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한시도 자신을 위해 살 수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녀는 지금 행복하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버팀목으로 살기만 했던 그녀가 2008년,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인 후로 자기 인생의 버팀목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행을 좋아한다.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으면 언제나 ‘여행’이라 말한다. 바쁜 현실에 자주 여행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그녀는 천국에서 우주 별 세계를 여행할 생각으로 힘든 현실을 이겨낸다. 그녀의 소망은 문덕애 씨, 문성조 씨, 문채빈 군의 손을 잡고 천국에 가는 것이다. 타인을 위해 살아온 그녀는 오늘도 시온에서 평안과 행복, 위로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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