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저녁, 아빠가 제 방에 들어오더니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고등학교, 어디 갈지 정했니?”
부모로서 당연히 묻는 질문이고, 누구나 물어볼 수 있는 물음인데 저는 짜증이 났습니다. 어쩌면 질문에 답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짜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몰라.”
저의 시큰둥한 대답에 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아빠는 네가 가까운 학교에 갔으면 좋겠다.”
“모르겠다니까!”
“…됐다.”
항상 모든 말을 “됐다”로 끝내시는 아빠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듣는 사람 기분만 안 좋아지는 대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저는 집에서 먼 고등학교를 가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 사이에 껴 있다는 것 자체가 마냥 좋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지쳤습니다. 통학 시간이 길고,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지는 느낌에 스트레스가 쌓였습니다. 집에 오면 가족들과 대화할 시간도 없이 학교 공부를 보충했고, 혼자 힘으로 안 되자 학원까지 다녔습니다. 날마다 밤늦게 집에 들어갔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와 책상에 앉았는데 아빠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셨습니다.
“학교 공부는 따라갈 만하니?”
아빠의 질문이 귀찮았습니다.
“어.”
“학교 다니는 건 힘들지 않고?”
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지만 “왜 아빠 말 안 듣고 먼 데 가서 고생하냐”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어. 잘 다녀.”
“…됐다.”
아빠와의 대화는 또 “됐다”로 끝났습니다.

다시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가 왔습니다. 대학을 갈지 아니면 취업을 할지 고민했습니다. 대학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지만 형편도 안 좋은데 학원까지 보내준 부모님께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빨리 돈을 벌어 부모님을 호강시켜 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가족을 위해 일한다는 것에 어깨가 무거우면서도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그런데 아빠는 아니었나 봅니다.
“대학교 가서 더 공부하는 건 어떠니?”
“싫어. 일할 거야.”
가족을 위해 대학을 포기한 저에게 대학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아빠가 미웠습니다.
“대학 등록금이 얼만데. 내줄 수도 없잖아.”
아빠는 또다시 “됐다” 하셨습니다.
저는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갈등하다 힘들게 하나를 포기하는데, 너무 쉽게 “됐다” 하시는 아빠가 정말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 결정대로 일하기로 했고, 다행히 좋은 직장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집과 멀어 출퇴근이 힘들어서 회사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했습니다. 혼자 지내자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휴일에는 엄마를 불러내어 외식도 했습니다.
하루는 아빠가 제가 사는 집 앞에 서 계셨습니다. 갑작스러운 만남이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아빠가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취향을 몰라서 점원이 골라주는 거 샀다.”
아빠가 건네주신 쇼핑백 안에는 분홍색 자켓이 들어 있었습니다.
“회사는 다닐 만하고?”
저는 아빠에게 집에 들어가자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디 가서 뭘 먹자고 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습니다. 아무 대답도 못 하는 저를 보고 아빠는 또 “됐다” 하시고 뒤돌아 가셨습니다.
저는 집으로 와서 휴대폰 최근 통화 목록을 보았습니다. 엄마, 대리님, 회사 짝꿍 유진 씨, 하다못해 초등학교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친구와도 전화를 했는데 아무리 봐도 아빠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빠가 마음에 걸려 주말에 집에 갔습니다. 오랜만에 가는 거라 고기도 사고, 엄마에게 줄 화장품과 아빠에게 드릴 셔츠도 샀습니다. 집에 들어가자 반갑게 반겨주는 엄마 뒤로 아빠가 소파에 앉아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저 왔어요.”
“그래.”
고기를 구워 먹으며 엄마와 한창 이야기하다 선물을 꺼냈습니다. 엄마는 마침 화장품이 떨어졌다며 좋아하셨습니다. 아빠에게도 선물을 드리니 아빠는 보지도 않고 “됐다” 하셨습니다. 부끄러워하시는 것 같아 다시 한번 드렸지만 역시나 “됐다”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묵묵히 TV만 보셨습니다. 아빠에게 화가 났습니다.
“아빠 생각해서 사온 건데 보지도 않으시면 어떡해요. 사온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받기라도 하세요. 싫으면 환불이라도 하게요. 그리고 왜 항상 모든 일에 됐다고만 하시는 거예요? 그 말 정말 기분 나빠요.”
그 뒤로 아빠와 더 어색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회사에서 만난 한 남자와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결혼식을 하루 앞둔 저녁, 저는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으로 갔습니다.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저를 안으셨고, 아빠는 그런 모녀의 모습을 보시더니 둘이 함께 자라며 방을 나가셨습니다. 엄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엄마가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빠가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 너를 많이 생각하고 있어. 잊지 마.”
당연히 아빠는 저를 사랑하시겠지만 엄마보다는 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엄마는 제 마음을 읽었는지 낡은 수첩 하나를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이건 네 아빠가 일기처럼 쓰시는 수첩이야. 한번 봐 봐.”
수첩을 펴니 저의 증명사진이 있었습니다. 아빠의 일기를 읽는 순간 눈물이 흘렀습니다. 나중에는 엄마 품에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아빠의 “됐다” 그 한마디는 ‘충분히 괜찮다’는 말이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제 결정을 존중해 주셨고, 저로 인해 가슴이 아프시더라도 제가 아빠 곁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당신은 행복하다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아빠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습니다. 아빠는 투박한 손으로 제 등을 두드려 주셨습니다.
“아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 아빠 정말 사랑해.”
아빠는 등을 두드리던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따뜻한 미소로 말씀하셨습니다.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