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에서는 뭐든지 열심히 하는 학생, 학교에서는...


9월 7일 토요일

중3 중간고사가 다가오고 있다. 시험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정희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정희가 교회에 다닌 지 이제 한 달이 넘었다. 시험 기간이라 예배를 못 드린다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정희가 오전 예배부터 올지 몰랐다. 내가 활짝 웃으니까 정희가 뭐가 그렇게 좋냐고 물었다. 그걸 꼭 말해야 아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선한 행실을 해야 한다는 설교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하는 게 선한 행실이냐고 물었다. 인사 잘하기, 청소 열심히 하기, 형제자매 섬기기 등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게 선한 행실이라고 말해줬다. 정희가 앞으로 존댓말도 써야겠다며 나한테 “복 많이 받으세요, 박진실 자매님”이라는 것이다. 어쩜 말도 예쁜 말만 골라서 할까. 정희는 만나는 식구마다 웃으며 인사하고 작은 쓰레기가 보이면 얼른 주웠다.
앞으로 정희가 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줘야지. 믿음이 흔들리면 잡아주고 은혜로운 말도 많이 해주고. 또 뭐 해주지? 아무튼 좋은 거, 복 받을 수 있는 거는 다 알려줄 거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계속 나온다. 열매는 자식 같아서 뭘 해도 예쁘다고 한 말이 이런 건가?

9월 11일 수요일

아침부터 장대비가 내려서 교복이며 가방이 젖어서 몸이 끈적끈적한데 등교하자마자 현주가 한소리했다. 이번 주에 주번인데 어제는 왜 그냥 갔냐고. 미안하다고 했는데도 현주는 몇 번을 되풀이했다.
정희와 점심을 먹으면서 현주가 너무한 거 아니냐고 말했더니 정희가 “너도 잘한 것 없다”고 했다. 당연히 내 편을 들어줄 줄 알았는데. 정희가 했던 말이 계속 생각난다.
“교회에서처럼 행동 좀 해봐”
자존심이 상하고, 생각할수록 기분 나쁘다.

9월 12일 목요일

정희를 편하게 대하기 힘들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정희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괜히 길을 돌아갔다. 방과 후에도, 주번이라 청소해야 해서 집에 같이 못 가니까 먼저 가라고 했다.
정희가 미운 건 아닌데 행동이 안 따라주니 답답하다. 쿨하지 못한 내가 정말 한심하다.

9월 13일 금요일

금요일은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니까 기쁜 마음으로 시온을 청소하자고 중학생 자매님들에게 아무리 말해도 한쪽에서는 떠들고, 한쪽에서는 장난치고, 청소는 대충대충. 다시 일일이 알려주며 청소했다.
내일 정희한테 교회에 오라고 해야 하는데 학교에서 말을 못해서 그냥 문자를 보냈다. 나 때문에 안 오면 어쩌나.

9월 14일 토요일

고맙게도 정희는 예배 시간에 맞춰 교회에 왔다.
오랜만에 소라 자매님도 왔다. 정희에게는 입도 뻥긋 안 하다가 소라 자매님에게는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자니 왠지 양심이 콕콕 찔렸다. 학생 담당 선생님의 말 때문에 정희 앞에서 더 부끄러워졌다.
“진실한 진실 자매님, 친구는 닮는다더니 정희 자매님도 청소를 잘하네요. 진실 자매님이랑 정희 자매님 두 분은 학교에서도 칭찬 많이 받겠어요.”
정희와 눈이 마주치고 뜨끔했다. 주번이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먼저 집에 갔던 거, 지각한 거, 수업 시간에 졸았던 거 등등 이번 주 내 모습이 빠르게 지나갔다.
정희가 교회에 처음 왔을 때, 나한테 멋있다고 했다. 자매님들을 챙겨주고 힘든 일도 앞장서는 모습은 처음 본다면서. 학교에서와 시온에서의 내 모습이 너무 달라서 정희는 “교회에서처럼 행동하라”고 했던 것일까.

9월 16일 월요일

자꾸 정희 눈치를 보게 된다. 오늘도 정수기 물을 흘렸는데 닦을까 말까 고민할 때, 수업 시간에 졸 때, 조금이라도 양심에 찔리는 행동을 할 때마다 그랬다. 그래서 정희를 마주하는 게 힘든지 모르겠다. 나의 안 좋은 모습을 보이게 되니까.
시온에서는 뭐든지 열심히 하는 착한 학생. 학교에서는 게으름 피우고 뺀질거리고 적당히 행동하는 얌체. 그런 모습을 정희한테 들켜서 부끄러웠던 걸까. 정희 눈치나 보고 슬슬 피한다고 나의 허물이 감춰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일주일 전만 해도 정희한테 좋은 건 다 줄 것처럼 해놓고 사람이 어쩜 이리 얄팍할까.
하나님께 회개해야겠다. 학교는 시온과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 그래서 은혜롭지 않은 행동들을 아무렇지 않게 했던 것(괜찮다고 합리화했던 마음도), 정희를 미워하고 힘들게 했던 일도 모두.

9월 17일 화요일

예배 전에 용기를 내서 정희에게 사과했다. 목구멍에서 나올까 말까 하는 목소리로.
미.안.해.
이 세 글자가 뭐가 그리 힘들다고. 정희는 눈물을 흘렸다. 표현은 안 했지만 나 때문에 힘들었던 모양이다. 나도 눈물이 났다. 하나님께 죄송하고 정희한테 미안해서.
정희가 그랬다. 앞으로 더 예쁜 모습이 되자고. 그래, 정말 그렇게 되고 싶다. 시온에서나 학교에서나 어디서나 하나님 자녀다운 진실이가 되자!
오늘에야 마음 편히 잠잘 수 있을 것 같다.

9월 23일 월요일

추석 연휴가 끝나고 학교에 갔다. 아침부터 마음이 설렜다.
이번 주 주번인 수미가 결석했다. 연휴 연장이라나. 아무튼 선생님께서 수미 대신 오늘 하루만 주번할 사람은 자원하라고 하셨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손을 번쩍 들었다. 정희도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우린 눈빛을 주고받았다. 서로 뺏기지 않을 거라는 미묘하고 기분 좋은 신경전(?)이었다.
방과 후 정희와 함께 주번인 선진이를 도와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교실을 정리했다. 시온에서처럼 아주 즐겁게.
정희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나님은 시온에만 계신 게 아니라 언제나 곁에서 늘 지켜보신다는 걸 그동안 잊었었다. 하나님께 죄송하다고, 이제부터 지켜봐 달라고 마음속으로 말씀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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