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미국 미네소타 주에 한 아이가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보다 더 자주 불렸던 별명은 ‘전 과목 낙제생, 지진아, 열등생’. 외톨이 소년에게도 좋아하는 일이 있었다. 만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내놓은 그의 만화 작품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했다.
불행과 실수를 몰고 다니는 소년, 담요가 없으면 불안해하는 아이, 똑바로 날지 못하는 새, 늘 공상에 갇혀 사는 강아지 등이 그가 만들어낸 만화 주인공들이었다.
외톨이 작가의 만화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 어느 신문에 연재가 되면서부터다. 그의 만화는 50년 간 전 세계 75개국 2600여 개 신문에 게재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만화가가 바로 ‘찰리 브라운’과 ‘스누피’로 잘 알려진 ‘피너츠 시리즈’의 작가, 찰스 M. 슐츠(1922~2000)다.
얼마 전에 본 다큐멘터리의 내용입니다. ‘외톨이 작가’와 ‘못난이 주인공’들의 해피엔딩에 마음속으로 박수를 치다가 문득 최근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들의 비보가 떠올랐습니다.
슐츠는 외로움을 이겨내고 결국 만화가로서 명성을 떨쳤지만 외톨이 시절을 견디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 상처와 아픈 기억이 평생 따라다녔을지도 모르지요.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손을 내밀어주었다면 그의 유년 시절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흔히 ‘왕따’라 불리는 학생들이 친구들에게 따돌림과 폭행, 그리고 그보다 더한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단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고 해서 혹은 화풀이할 누군가가 필요해서 친구들을 괴롭히는 가해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왕따가 되기 전에 미리 따돌림에 동참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지요. 호기심에 시작한 따돌림이라 할지라도 피해 학생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된다는 것을 모르나 봅니다.
갈수록 교내 분위기가 삭막해져서일까요. 몇 년 동안 아픈 친구를 대신해 등하굣길에 가방을 들어준 한 학생의 미담이나, 장애가 있는 학생들에게 반 친구들이 짝이 되어 도움을 주는 한 고등학교의 소식은 저의 마음 구석구석까지 훈훈하게 해주었습니다. 선생님의 전달 사항을 알려주거나 청소를 같이 하는 등 친구가 외롭지 않게 함께 있어주는,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지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 학생들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던 이유는 오래도록 마음 한편에 머물러온 한 조각의 기억 때문입니다.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에 선천적으로 한쪽 다리가 불편하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놀이공원으로 봄소풍을 간 날에도 그 친구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담임 선생님이 같이 다닐 사람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했지요. 서로 얼굴만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데, 한 친구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 친구는 몸이 불편한 친구를 부축하며 놀이공원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목련꽃보다 더 화사했던 두 친구의 웃음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선생님이 물어봤을 때 저는 손을 들려다 말았습니다. 도와주겠다고 나서면 괜히 정의로운 척한다고 다들 흉을 볼 것 같아 창피하기도 했고, 친구 챙기느라 즐거운 소풍을 망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살짝 들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던 일은 내내 후회로 남은 반면, 외톨이 친구와 함께한 친구의 모습은 오래도록 감동으로 남았습니다.
피너츠 시리즈가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도 서툴고 모자란 주인공들끼리 서로 보듬어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를 외롭게 만들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족할지라도 누군가 도움이 필요할 때 위로해 주고 격려해 준다면 외톨이가 되어 마음 아파하는 학생들도 점점 줄어들 것 같습니다.
하늘 아버지 어머니께 사랑을 넘치도록 받은 여러분은 주위에 나눠줄 사랑이 더 많습니다. 한 번뿐인 학창 시절, 상처받은 친구들을 따뜻한 가슴으로 보듬어주는 학생들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미약한 나의 온기가 누군가에게는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고마움으로 남기도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