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시외 학교, 다시 말하자면 도시 밖에 위치한 시골 학교다. 어려서부터 줄곧 동네에 있는 학교만 다녔던 터라 고등학교는 시골에서 해방되어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도시에 있는 학교는 집에서 멀어 포기해야만 했다.
학교에는 도시에서 온 학생들과 시골에 사는 학생들이 모여 있어 서로를 도시 친구, 시골 친구로 나눠서 불렀다. 난 친구들에게 시골 친구로 불렸다. 시골 친구라는 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친구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몇몇은 나처럼 ‘시골’이라는 수식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명 브랜드 옷으로 치장을 하던 친구도 있었는데 아마도 그 ‘시골티’를 벗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집에는 고추 200포기를 심고도 남을 정도로 넓은 텃밭이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동생과 함께 밭의 풀을 뽑거나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고 햇볕에 널어놓은 고추를 걷는 일을 했다.
한번은 친구들에게 내 피곤한 일상을 얘기했는데 나를 위로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도시에서만 살았던 친구들은 밭에서 농작물을 거둔다는 것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나는 인심 쓰는 척하며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학기가 시작될 즈음이었으니 길에는 냉이며 쑥이 가득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 창밖으로 펼쳐진 너른 밭과 논을 보고 친구들은 진짜 시골이라며 시시덕거렸지만 말로만 듣던 냉이와 쑥을 캘 수 있겠다며 들떠 있었다. 집에 도착한 후 친구들에게 호미를 한 자루씩 쥐어주고 민들레와 냉이를 구분해 알려주었다.
그로부터 소위 ‘농촌 체험’이라 하여 방과 후 친구들을 자주 집으로 데려왔다. 물론 친구들과 수다 떠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소정의 목적도 잊지 않았다.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히고 친구들에게 고춧대가 부러지지 않도록 고추를 따는 법을 알려주면 친구들은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고 무성하게 자란 잡초도 뽑았다. 어느 정도 일하고 나면 우리는 밭에 있는 상추와 깻잎, 쑥갓을 따서 밥을 먹었다. 특별한 반찬이 없어도 친구들은 밥그릇을 뚝딱 비웠다. 땀 흘리고 먹는 거라 더 맛있었을 것이다.
학년이 올라가도 친구들은 나에게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일을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친구들은 그 시간을 무척 소중한 추억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학교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시골은 어느새 나의 자랑거리가 되어 있었다.
가끔 연배가 비슷한 사람들과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름대로 재밌기는 해도 나의 낭만적인 학창 시절을 능가하지 못한다. 봄이면 집 앞에 있는 앵두며 오디를 따서 친구들에게 나눠주던 일, 여름에는 냇가에 발 담그며 물놀이를 하다 옥수수나 수박을 서리해 먹었던 일, 동네 잔치를 방불케 했던 가을 체육대회를 위해 매스게임을 준비하며 뛰놀았던 일, 겨울에 교실에서 피우는 나무 난로에 집에서 가져온 냄비를 올려 놓고 찌개를 만들어 먹었던 일까지,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나의 소중한 추억들이다.
남들의 시선을 따지다 보면 정작 내가 가진 것의 가치를 놓칠 때가 있다. 남의 좋은 것을 부러워하고 나의 여건을 탓하면 불만은 끝없이 자란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부끄럽게 여겼던 것도 최고의 보배가 될 수 있다.
영원한 축복이 약속된 참 진리를 가진 시온의 학생들처럼 하나님의 바른 교훈과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우리 학생들은 최고로 값진 보물을 가졌다. 그 가치를 깨달으면 쉬지 않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