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를 모르는 당신에게 下

“윽, 시간표 바꿔 들고 왔어!”
“이한수, 요새 학교 잘 다닌다 했다. 일주일 만에 도루묵? 큭큭.”
“오늘 뭐지? 국어, 영어는 겹치고…. 1교시 과학! 아, 이거 어떡해.”
“교과서는 옆 반 가서 빌리면 되는데 노트 어떡하냐. 과학 쌤 필기에 예민한데.”
책상 서랍에 손을 넣고 휘저었지만 아무것도 안 잡혔다. 사물함을 뒤졌다. 에메랄드빛 노트가 반짝반짝 빛났다.
“아싸, 노트 해결!”
“교과서는 내가 빌려왔다.”
“오, 의리 영석!”
꼬일 뻔했던 하루가 잘 풀렸다. 이번에 배우는 주제도 내가 좋아하는 우주였다. 신나서 펜을 들었다.

지구

번쩍.
불현듯 ‘산소’가 지워졌던 것이 기억났다. ‘지구’ 역시 사라졌다.
‘설마. 또 무슨 일 일어나는 거 아니겠지?’
무서워서 펜을 잡지 못했다. 그러나 영어 시간에 ‘블라블라~’에 치이고, 수학 시간에 방정식 근에 갇히고, 긴박한 점심시간과 점심 이후의 나른함에 불안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트는, 잠들기 전 책가방을 정리할 때에야 생각났다.
“에이, 아닐 거야.”
걱정이 무색하게 금방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쁨도 희망도 다 덮어버린 어둠뿐이었다. 어둠 가운데로 수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그들 앞에 커다란 문 두 개가 놓였다. 문 하나는 문을 녹일 것처럼 뜨거운 불이 새 나왔고, 다른 하나는 눈부시게 빛났다. 사람들은 울며 무릎을 꿇거나 기뻐서 뛰었다. 그 사이에 누군가가 이 무리를 구분하고 있었다.
“김한수.”
내 이름이 불렸다. 갑자기 짧았던 나의 삶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온몸이 떨리고 오한이 밀려왔다.
“그대 김한수. 기록이… 게으름을 피우다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남을 사랑하기보다 미워한 적이 많고, 삶의 가치도 모르고….”
“아니에요! 전 아직 어리고 배울 게 많거든요. 제가 지구에서 좀 더 살면 바뀔 거예요. 사랑하고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기회는 없다. 판결을 내린다. 김한수 그대가 들어갈 문은….”
“안 돼요!”
삐비비빅― 삐비비빅―.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후―. 살았다.”
아침 자습 시간, 에메랄드 노트를 펴고 고뇌에 빠졌다.

To you who don’t know the value of what you have.


“‘갖고 있는 것의 가치를 모르는 당신에게’라….”
이 노트에 무언가를 쓰면, 그것이 사라졌을 때의 일이 꿈으로 나왔다. 필시 보통 노트가 아니었다. 더 이상 노트를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엄청난 물건이다.
“반장!”
자습이 끝나자마자 반장을 불렀다.
“우리 사물함 비는 거 없어?”
“있긴 해. 쓰려고? 자기 거 외에 다른 거 또 쓰면 안 되는데.”
“하나만 잠깐 넣어둘게. 금방 뺄 거야.”
“그래, 그럼. 어디냐면….”


방학은 모든 것을 잊게 했다. 계절은 서늘하게 바뀌었다. 6교시가 끝나고 급하게 화장실에 갔다 교실로 들어왔다. 종례 시간 세이브! 좀만 늦었으면 혼날 뻔했다.
“안내장 하나 나간다. 학부모님들 확인이 중요한 내용이니까 사인 받아와라. 내일까지 꼭이다.”
잊어버릴까 봐 손등에 ‘부모님 사인’이라고 적었다.
“김한수. 나 빨강 펜 좀.”
영석이가 뒤돌아 나를 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뭐냐, 지저분하게. 문화인답게 좀 적어.”
영석이가 노트를 내밀었다. 성의를 봐서 적었다.

번쩍.
등줄기가 오싹했다.
“강영석, 이 노트 뭐야?”
“네 거 아냐? 반장이 김한수 거일 거라고, 너 주라던데. 전학생 온다고 빈 사물함 정리했다나 뭐라나.”
“김한수 강영석. 너희끼리 종례하나! 조용히 해.”
패닉이 왔다. 생각하기도 싫다. 종례를 마치고 집으로 곧장 달려갔다.
“엄마! 엄마!”
“그래, 잘 다녀왔어? 오늘은 왜 이리 엄마를 찾을까?”
“그게… 내일까지 부모님 사인 받아 오라고 해서요.”
“탁자에 올려 놔. 손 씻고 밥 먹자.”
“네.”
늦은 밤,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까지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내 방으로 들어왔다. 노트를 펼쳐놓고 책상에 앉았다. 엄마 아빠는 내가 공부하는 줄 알았는지,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던 새 나라의 청소년’이 요즘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잔다며 칭찬 반, 놀림 반으로 이야기했다. 침대에 누웠다가는 곧장 꿈나라 직행 각이라 책상에서 버텼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그럼 그렇지.’
그대로 책상이었다. 지난번 꿈들은 정말 우연한 꿈들이었던 것이다.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고, 물을 마시러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뭔가 이상했다. 냉장고가 비었다. 집 안을 둘러봤다.
“집이 왜 이래?”
정리되지 않은 집에는 먼지가 앉아 있었다. 온기마저 없는 집은 숨 막힐 정도로 적막했다.
“엄마? 아빠?”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엄마! 아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안방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다. 엄마 아빠의 물건도 없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가슴에 뻥 뚫린 구멍으로 혼자라는 두려움이 마구 파고들었다. 무섭고 아팠다.
‘언제나 내 곁에 있을 줄 알았는데, 인사 한번 제대로 안 했는데, 고맙다는 말도 못했는데….’
세상이 멈춰버린 것 같다. 눈물이 쏟아졌다. 울고 또 울었다, 하염없이.
삐비비빅― 삐비비빅―.
따뜻한 밥 냄새가 났다. 이불을 박차고 방을 뛰쳐나갔다. 아빠는 식탁에 앉아 있고, 엄마가 가스레인지 앞에서 막 국을 뜨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어머, 한수야!”
“왜 이래, 얘가. 어제는 책상에 엎어져 있길래 침대에 옮겨놨더니만. 몸이 안 좋아?”
엄마 아빠 부축을 받으며 훌쩍였다.
“엄마… 아빠.”
“어, 그래. 어디가 아파.”
“흑, 사랑해요.”
“….”
“….”
“확실히 아프구만.”
“요새 이상하더라니, 너 사고 쳤지?”
뭐라 해도 좋았다. 엄마 아빠를 꽉 안았다.
“다 큰 놈이, 징그러워!”
“이제 놔라. 계란말이 탄다.”
엄마 아빠는 잔소리하면서도 오래도록 내 팔에 안겨주었다.
산소, 지구, 부모님…. 신경 쓸 필요도 없이 너무나 당연했던 것들이다. 하지만 그 당연한 것들이 나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였다. 내가 날마다 살아가는 오늘이라는 이 삶이, 숨을 쉬는 공간이, 나의 집 나의 가족이.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다시 둘러본다. 나무, 하늘, 친구들, 때로는 무섭고 나를 힘들게 하는 선생님들도. 이 모든 것이 없으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감사합니다.”
하늘을 향해 저절로 이 말이 나왔다. 전쟁 같기만 했던 하루가 평화롭다.
교실에 1등으로 도착해 노트를 폈다.
‘첫 장에는 글씨 써도 되나?’
영어 아래 이 말을 덧붙여 써 넣었다. 당연히 한국말로.

“강영석, 하이!”
“네가 웬일로 인사를 다 하냐.”
“영석아, 참 아름다운 날이지 않니?”
“뭐래, 아침부터. 내 얘기나 들어봐. 어제 진짜 짜증 나는 일이 있었다니까.”
노트의 새 임자를 찾은 것 같다.


***

4교시 영어 시간. 어제 밤늦게까지 게임하느라 계속 꾸벅꾸벅 졸았다. 선생님한테 걸릴까 봐 뭐라도 끄적대려고 노트를 꺼냈다. 지난주에 아빠가 억지로 데려간 헌책방에서 산 노트였다. 헌책방에 노트가 꽂혀 있어 의아했다. 그런데 에메랄드빛이 아주 멋졌다. 살 책도 없었던지라 이 노트를 골랐다. 노트를 펴고 내 마음의 소리를 낙서했다.
‘자고 싶어. 잠을.’
영어 시간이라 양심상 영어로 적었다. 단어로만.

sleep


번쩍.
내 눈이 이상했다. 정말 자야 할 것 같았다. 점심을 포기하고 교실 책상에 엎드렸다. 그리고 괴상한 꿈을 꿨다. 아니, 악몽도 이런 악몽이 있을까. 몸이 너무 힘들고 정신도 제정신이 아닌데 잠이 들지 않았다. 사람들도 하나같이 퀭했다. 다크서클이 깊어 좀비가 따로 없었다. 몸서리치며 겨우 깼다.
왠지 노트가 께름칙해서 분리수거장에 버리러 갔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거기 있던 선배에게 맡기고 달려 나왔다. 제시간에 잘 자야겠다, 게임 같은 거 하지 말고. 그 선배에게는 미안하다. 그 선배… 별일 없겠지?
G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