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를 모르는 당신에게 上

삐비비빅― 삐비비빅― 삐비… 탁!
아침이라는 전쟁이 시작됐다. 어제는 일요일. 전투는 배로 격렬할 것이다.
“한수야! 잠 깨다가 날 새겄다!”
“….”
“그만 일어나! 8시야!”
버틸 때까지 버텼지만 이불 밖 세상으로 발을 내디뎌야 했다.
“일어났어요!”
전투태세에 여유는 사치다. 먹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식량을 위에 밀어 넣고 현관으로 돌진했다.
“다녀오겠습니다!”
“한수야, 잠깐….”

엄마가 불러도 필사적으로 뛰었다. 뒤돌아보는 것은 미련이다. 한 3분쯤 달렸을까.
“아, 체육복!”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악몽보다 괴담보다 무서운 것이 체육복 미착용이다. 체육 선생님은, 체육과 미술이 국영수에 밀려 등한시되는 세태에도 ‘공(부)력은 체력, 지성은 예술’이라는 명언을 남기며 예체능 부심을 지키는 난세의 영웅이자 ‘걸리면 기절’이라는 명성을 날리는 분이다.
“체육복은? 체력을 다져야 정신도 차리지. 운동장 열 바퀴.”
불면증이 심한 아이라도 그렇게 체력을 쏟고 나면 그날 밤만큼은 푹 잔다고 한다. 난 머리만 대면 잘 잔다. 아침마다 이리 뛰는데 운동장 열 바퀴라니! 일단 후퇴. 뒤돌아 힘껏 달렸다. 위에 저장해둔 나의 에너지가 꿀렁거렸다.
“엄마! 헉헉. 체육, 헉. 복.”
“그러니까 부를 때 볼 것이지.”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온 “엄마 말씀 잘 들어라”. 그 교훈을 무시한 것이 진짜 미련이었다.
텁텁한 공기를 세차게 들이마시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적진에 들어섰다. 지각. 담임 선생님은 무서운 분은 아니지만, 정당한 사유 없이 기본 철칙을 어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분이다. 특히 늦잠으로 인한 지각은 기강 해이의 원흉으로 친다. 교실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크게 하고 문을 열었다.
드르륵.
“나가 있어.”
드르륵.
문을 닫음과 동시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적진 수장의 포로가 되어 복도에 갇혔다.
‘그냥 체육 선생님한테 벌받을 걸 그랬나? 아니야, 힘 빼느니 담임 선생님한테 잔소리 좀 듣는 게 낫지. 나을 거야…. 나아야 할 텐데….’
드르륵.
수장께서 복도로 납시었다.
“이유?”
“체육복 가지러….”
“안 들려. 뭐라고?”
“체육복! 가지러! 집에 다시 갔다 와서요!”
“아오, 고막 터지겠다. 그러게 처음부터 잘 챙겨 나왔어야지. 너 중3이야. 금방 고등학생이다. 내신 관리 습관 들여야 돼….”
정신을 쏙 빼는 일장 연설 고문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나의 눈은 전원 오프 상태가 되어갔다.
‘항복, 항복! 앞으로 지각하지 않겠습니다.’
딩동댕동―.
1교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이토록 감미로울 줄이야.
“알겠어? 점심시간 그리고 방과 후에 학생부장 선생님 좀 도와드려. 창고랑 분리수거장 정리하면 돼.”
“네. 네?”
담임 선생님은 “잘해”라는 멘트를 날리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학생부장 선생님은 FM의 표본이었다. 뭐 하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게다가 엄청 깔끔하다.
“김한수. 왜 지각?”
“체육복 놓고 나와서 도로 집에 갔다 오느라.”
“그러게, 잘 챙기지.”
“강영석. 너는 적이냐, 동지냐?”
“우리가 동지인 적은 있나?”
“이런 변변한 변절자.”
영석이는 콧방귀만 뀌었다. 얄미워서 뒤통수에 주먹질을 하는데 사회부장이 왔다.
“오늘 1교시 사회 시간에 단원 평가 있는 거 알지?”
“무슨?”
“난 말했다.”
“아….”
오늘은 완벽한 참패다.

딩동댕동―.
점심시간 종이 울렸다. 우레 같은 함성과 불도저 같은 발소리가 들렸다. 평소 같으면 저 무리에 속해 있어야 하지만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 김한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학생부장 선생님이었다.
“오늘 청소 돕기로 했다고 너희 담임 선생님께 들었다. 정리할 게 꽤 많아. 점심 든든히 먹고 와라. 방학 전에 깨끗이 정리해 놓자고.”
“아, 예.”
영석이가 짠하다는 얼굴로 햄 하나를 내 배식판에 건넸다. 점심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을 줄 알았는데 4교시 후의 점심은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 그래, 먹자. 먹어라. 힘을 키워야, 컥!
“쿨럭쿨럭!”
“괜찮냐?”
“커억, 물!”
“여기. 너 오늘 일진 사납다.”
눈물이 핑 돌았다.
창고에서 이 악물고 청소했다.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먼지가 많은지, 조금이라도 입을 열었다가는 1년 치 먼지를 한번에 들이킬 것 같았다. 학생부장 선생님은 먼지에 아랑곳없이 아니, 오히려 먼지를 풀풀 날리며 창고 물건을 정리했다. 인내심이 바닥난 나는 선생님이 빼낸 쓰레기들을 모아 분리수거장에 내놓겠다는 명목으로 얼른 창고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햇볕이 내리쬐는 분리수거장 역시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살짝만 움직여도 땀이 뻘뻘 났다. 그런데 웬 아이가 다가왔다.
“저, 이것도 좀….”
아이는 노트를 내 손에 던지듯 쥐여주고는 도망쳐버렸다.
“하, 딱 봐도 1학년인데.”
불러서 뭐라 한 소리 하려다 말았다. 내가 불량 선배도 아니고, 벌써부터 꼰대 소리 듣긴 싫었다. 그보다 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다 못해 창백했다, 눈까지 충혈돼서.
‘어디 아픈가?’

노트를 봤다. 겉표지는 낡았지만 에메랄드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휘리릭 넘겼다. 속지는 아주 깨끗했다. 마침 과학 노트를 새로 사야 했는데 잘됐다 싶었다.
“이런 멀쩡한 걸 버리다니, 요즘 애들이란. 쯧쯧.”
5교시를 잘 버텨서인가, 6교시는 시작부터 눈꺼풀이 너무나 무거웠다.
‘필기를 하자.’
비장한 마음으로 노트를 펼쳤다. 첫 장에 영어가 쓰여 있었다.

To you who don’t know the value of what you have.


‘어… 음…. 너에게, 모르는, value? 뭘 가져?’
더 피곤해졌다. 앞자리에 앉은 영석이를 쿡쿡 찔렀다. 영석이가 째려보며 돌아봤다. 영석이에게 노트를 건넸다.
“이거 뭔 말?”
영석이는 노트를 흘끗 보고는 소곤댔다.
“불만 있음 그냥 말로 해. 한국말.”
“기대한 내가 잘못.”
“어이, 거기! 수업 시간에 왜 떠드나? 뭔데 그래, 선생님한테도 말해 봐.”
딱 걸렸다.
“이거 뜻이 궁금해서요.”
선생님이 노트를 받아 들고 읽었다.
“To you who don’t know the value of what you have. 갖고 있는 것의… 가치를 모르는 당신에게.”
“오~!”
반 아이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시끄러워! 그리고 너. 지금 네가 갖고 있는 가치가 뭔지 아나? 과학 공부다, 과. 학. 공. 부. 영어는 영어 시간에 열심히 했어야지. 과학의 가치를 모르는 당신아, 어여 필기하세요.”
“네.”
조용히 넘어가 다행이었다.
“자, 다들 집중! 화학반응에는 열이 방출되는 발열반응과, 열을 흡수하는 흡열반응이 있다. 발열반응 중 연소반응은 물질이 빛이나 열을 내면서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해….”
마음을 다잡고 펜을 들었다.

산소


번쩍.
번개? 하늘은 쨍쨍했다. 아이들도 무덤덤하게 앉아 있었다. 노트를 들여다봤다. 방금 적은 ‘산소’가 없어졌다! 에메랄드빛 자국이 보이는 듯했지만 두 눈 씻고 봐도 글씨는 보이지 않았다.
‘흑, 불쌍한 김한수. 점심에 쉬지도 못하고 졸리지? 쓰지도 않고 썼다고 착각까지 하다니. 수업 끝나고 또 창고 정리 해야 하는데 6교시는 좀 쉬자. 필기 포기. 나중에 영석이 거 베껴야지.’
고된 노동(?)으로 밤에 일찍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시침은 오전 7시를 가리켰다. 그런데 하늘이 새까맸다. 등은 무겁고 내 입에 호흡기가 달렸다. 점점 숨이 가빠지고 의식이 희미해졌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식물원같이 사방이 풀로 덮인 곳이었다. 나처럼 입에 호흡기를 찬 아빠 엄마가 보였다.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모두 호흡기를 끼고 등에 산소통을 지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아빠가 말했다.
“무슨 일이긴. 지구에서 산소가 사라지고 있잖아. 그나마 이 정원이 남아서 산소를 공급받을 수 있지. 여기까지 사라지면 모두 끝장이야.”
“말을 아껴라. 산소라 빨리 떨어지니까.”
엄마가 내 어깨를 잡았다. 순간 사이렌이 울렸다.
“정원이 사라지고 있어요!”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엄마 아빠가 나를 꼭 안았다. 숨 쉬기가 고통스럽고 머릿속이 멍해졌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bookImg2#삐비비빅― 삐비비빅―.
벌떡 일어났다. 숨이 쉬어졌다. 얼굴에는 식은땀이,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엄마!”
“옴마, 지금 7시인데? 잠꼬대 아니지?”
“이 시간에 한수 얼굴을 보다니 해가 서쪽에서 떴나. 내가 출근해야 일어나는 녀석이….”
“아빠!”
엄마 아빠는 별 신기한 일 다 본다는 듯 나를 봤다.
중학교 입학 이래 처음으로 여유롭게 아침밥을 먹었다. 교복도 말끔히 입고 집을 나왔다. 깨끗하고 맑은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수업 시간은 무난히 지나갔다. 영어 시간에 영어 지문 읽다가 혀 좀 꼬였고, 미술 시간에는 정물화 그리다가 물통을 잘못 건드려서 살짝 흘렸다. 정말 살짝, 대걸레로 서너 번 닦을 정도? 아침에 체육복도 잘 챙겨 나왔다. 이제 과학 시간. 노트를 꺼냈다.
‘아, 노트!’
‘산소’라는 글씨가 번쩍하고 사라진 것이 기억났다.
‘에이, 무슨.’
더 생각할 겨를 없이 과학실로 향했다. 실험 평가 하느라 다시 필기할 시간도 없었다. 찜찜한 노트는 사물함 깊숙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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