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上

“비… 오네.”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봄 어귀라지만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며 오싹한 한기를 만든다. 시린 공기가 소녀의 콧속으로 들어간다.
날씨만큼이나 차가운 교실이었다. 1점 차이로 내신 등급이 바뀌고 미래가 달라진다고 믿는, 흔한 고등학교의 교실. 새 학기의 풋풋함과 새 친구 탐색전의 두근거림은 고1까지였다. 고2쯤 되면 얼굴은 어느 정도 텄고, 얄짤없이 야자가 시작된다. 팍팍한 분위기야 익숙하지만 그렇다고 적응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울감은 마음에 콱 박힌 원인 모를 상처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집에 가서 쉴까?’
야자 조퇴하고 학교를 나오려는데 비가 내렸다. 교무실에 들를 때까지만 해도 분명 오지 않던 비였다. 봄비라 하기에는 무거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야자나 할걸. 소녀는 한숨을 크게 내뱉고는, 손을 뻗어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비의 촉감을 느낀다.

“어? 왜 지금 가?”
옆에 반장이 서 있다. 반장은 교실 분위기 메이커다. 비 온 뒤 마주한 햇살처럼 밝은 반장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는 없다. 반장은 지금도 뭐가 그리 좋은지 생글생글 웃는다.
“조퇴. 비 오려고 그랬나, 기분이 꾸리꾸리해서.”
“난 비 오니까 좋은데. 미세먼지도 없어지는 것 같고.”
자기 딴에는 그냥 한 말이겠지만 소녀에게는 얄밉게 들린다.
“우산은 있어? 없으면 같이 쓰고 나가자. 나도 학원 가는 날이라 나왔….”
“우산 없어도 돼. 먼저 간다.”
말을 끊고 빗길을 뚫고 달린다. 뒤에서 뭐라고 소리치는 반장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소녀는 그저 달린다. 비를 피하려고 달리는 건지, 반장을 피하려고 달리는 건지. 한참을 달리다 물웅덩이에 발을 헛디뎌 미끄러진다. 아픔을 느낄 틈도 없이 빠르게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야 몸 상태를 확인한다. 구정물이 교복에 다 묻어 그야말로 만신창이다. 빗물에 젖은 머리 때문에 더 비참하다. 버스를 타봤자 사람들에게 피해만 줄 것이다.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20분이면 집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찰방찰방.
경쾌한 물소리가 들린다.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려 소녀는 뒤를 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

노란색 우비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작은 아이가 눈을 땡그랗게 뜨고 소녀를 올려다보고 있다. 손에 자기 키만 한 빨간 우산을 들고.
“어… 안녕?”
“왜 비 맞아?”
소녀는 당황해서 말이 안 나온다.
“난 비 맞는 거 싫어.”
소녀가 답하지 않아도 아이는 혼자 답한다. 아이가 귀엽다.
“비 맞는 게 왜 싫어?”
“비 맞는 거 안 좋아.”
“왜 안 좋은데?”
“우리 엄마가 그랬어. 감기도 걸린대.”
소녀는 그냥 웃어버린다.
“그래. 비 맞는 거 안 좋아.”
그런데 나는 왜 비를 맞고 있을까.
“자, 이거 써.”
아이가 빨간 우산을 소녀에게 준다.
“난 우비 있어서 안 써도 돼. 장화도 신었어.”
“이거 나한테 줘도….”
“안녕!”
아이는 소녀의 말을 듣지 않고 가볍게 뛰어간다.
찰방찰방.
아이가 골목으로 쏙 들어가 보이지 않는다. 소녀는 빨간 우산을 손에 쥔 채 아이가 뛰어간 골목만 바라본다.

“날씨 한번 짜증 나네.”
주말까지 내린다는 봄비에 아이들이 투덜댄다. 평소 같으면 쉬는 시간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엎드러져 있겠지만 소녀는 계속해서 책상 옆에 둔 빨간 우산을 만지작거렸다. 아이에게 우산을 돌려줘야 하는데 오늘도 거기 있으려나. 소녀는 종례가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도 빨리 가는….”
“아, 몸이 안 좋아서.”
반장을 무시하고 소녀는 학교 밖으로 달린다.
투둑투둑.
작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소녀는 어제 그 골목에 서서 주위를 살핀다. 어제 왔다고 오늘도 오리란 보장이 없건만. 소녀는 한숨을 쉰다.
찰방찰방.
소녀는 소리 나는 쪽으로 몸을 돌린다. 아이가 물웅덩이에서 깡총깡총 뛰며 장난을 치고 있다.

“안녕!”
소녀가 반갑게 인사하자 아이는 느릿하게 고개를 든다.
“이거 돌려주고 싶어서.”
소녀가 빨간색 우산을 건네자 아이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발로 물을 찰방인다.
“안 줘도 돼. 선물로 준 거야.”
왜? 묻지도 못하고 소녀는 당황한다. 아이는 발 장난을 멈춘다.
“그럼 안녕.”
“잠깐만!”
아이는 또 땡그란 눈으로 소녀를 바라본다.
“아… 저,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사줄게.”
한다는 말이 겨우 아이스크림이라니.
“엄마가 아이스크림 사준다는 사람 따라가지 말랬는데.”
아파트 단지 정자 밑. 빨간 우산을 손에 쥔 소녀와 노란 우비를 입은 아이가 앉아 있다. 아이가 초코우유를 쪽쪽 빤다.
“맛있니?”
“아이스크림 먹으면 감기 걸려.”
소녀가 키득키득 웃는다. 아이스크림 사준다는 사람 따라가면 안 된다고, 자기 돈 내고 초코우유를 산 아이였다. 덩달아 소녀는 바나나우유를 집었다.
“근데 너는 이름이 뭐야?”
아이가 입에 있던 초코우유를 꿀꺽 삼키고 빨대를 뺀다.
“비.”
“응? 뭐라고?”
“비, 라고.”
소녀가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본다.“아… 예쁜 이름이구나. 그럼 비야, 왜 나한테 우산을 준 거야?”
“비는 구름을 따라다닌대. 그냥 옆에 있다가 준 거야.”
“내가 구름이야?”
“응. 구름 같아. 시커먼 먹구름.”
“먹구름….”
아이의 말을 곱씹는다. 어제는 분명 기분이 안 좋았다. 아니 사실 그전부터, 오래전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매일같이 흘러가는 일상은 무거웠고 이따금 번개도 쳤다.
“그래. 나는 먹구름일지 모르겠다.”
아이가 물끄러미 소녀를 올려다본다.
“오늘은 괜찮아.”
“응?”
“조금 걷혔어. 봐 봐.”
아이는 하늘을 가리킨다. 잿빛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파란 하늘이 보였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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