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꿈

엄마는 태어나서 스무 살까지 산과 논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살았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할머니(엄마의 엄마)가 일을 시작하셨다.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지병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 일을 하시느라 한 달에 며칠만 겨우 집에 오실 수 있었다. 할아버지(엄마의 아빠)도 일 때문에 한 달에 사나흘만 집에 계셨다.
엄마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집은 텅 빈 공간이었다. 엄마와 열 살 차이 나는 이모(엄마의 언니)가 제때 밥을 챙겨주긴 했지만, 이모가 아무리 엄마 노릇을 해주더라도 할머니의 빈자리를 다 채워줄 수 없었다. 힘들 때나 외로울 때 편히 고민을 털어놓고, 품에 안겨 위로받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엄마’뿐이었던 것이다.
중학교에 올라간 후로도 집안 사정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사춘기까지 찾아온 엄마는, 할머니가 집에 없다는 핑계로 놀러 다니고 공부와 멀어졌다. 엄마는 힘들게 일하는 할머니가 안쓰럽고 고마운 한편 함께 있어주지 못한다고 원망했다.
엄마가 고등학생이 되었다. 중학생 때처럼 나쁜 길로 빠져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얌전히 학교생활을 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딱히 하고자 하는 것도 없어서 공부에 집중하지도,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교실 뒤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으며 지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던 엄마의 꿈은 ‘현모양처’였다.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아서 가정을 잘 돌보는 좋은 엄마가 되는 것. 이것이 엄마가 꿈꾸는 최고로 행복한 삶이었다.
할아버지는 엄마가 대학에 진학하길 바라셨다. 하지만 엄마는 공부에 자신이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두 번 치르는 수능을 한 번밖에 응시하지 않았고 ―당시에는 1차, 2차로 봤다고 한다.― 대학 원서를 넣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서울로 올라가 간호학원을 다니라고 하셨다. 짐 가방 하나 달랑 싸서 무작정 상경한 엄마는 간호조무사 기숙학원에 들어갔다. 방 3개, 거실 하나 있는 기숙학원에서 전국 각지 사람들과 생활하며 아침부터 오후 4~5시까지 공부해서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땄다. 시골집 근처 종합병원에서 4개월 실습을 마치고 서울에서 면접을 봤다. 치과, 소아과, 가정의학과 등 몇 군데나 면접을 봤지만 취직이 되지 않았다. 키가 크고 마른 엄마를 보고, 가는 병원마다 “몸이 약할 것 같아서 안 된다”, “서서 일해야 하는데 키가 커서 힘들 것 같다” 등의 이유를 댔다. 그러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간 병원에 취직되었다.
나중에 엄마는 큰 병원으로 이직하고 싶어 했는데, 할머니가 돈을 많이 벌기보다 안정적인 곳에서 오래 일했으면 하셨다. 엄마의 마음속에는 부모님 속을 썩이지 않겠다는 고등학교 시절의 다짐이 있었기에 할머니의 바람대로 첫 직장에 남았다. 이후 엄마에게 일이란, 엄마를 서 있게 하는 버팀목이 될 정도로 인생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스물일곱 살에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아빠를 만났다. 엄마는 결혼하고 첫째인 나를 낳고도 계속 일을 했다. 작은 아파트를 구한 뒤 오직 좋은 환경에서 나를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가정. 그런 가정을 꾸리는 일이 엄마의 평생소원이었고, 그것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엄마가 동생을 낳았다. 그때부터 일을 관두고 가정주부의 삶을 살고 있다. 엄마는 집에서 나와 동생을 사랑으로 따뜻하게 돌봐준다.
엄마는 ‘엄마’가 되면서 할머니를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여러 힘든 일을 겪으며 오랜 세월을 사셨기에 할머니에게 마음의 병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다행히 같이 간 병원에서는 할머니에게 전혀 이상이 없다고 진단했다. 할머니도 이제 당신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엄마는 할머니가 얼마나 강한 분인지 느꼈다. 엄마와 할머니는 현재 아주 친한 친구처럼 지낸다. 엄마는 할머니를 존경하고, 아주 멋진 분이라고 말한다. 내가 보는 할머니도 항상 웃고 인자하셔서 넓은 그늘을 드리운 큰 나무처럼 느껴진다.
재작년 여름, 우리 집이 갑자기 어려워져 엄마가 한 달간 일을 나갔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밤 11시가 넘었다. 그때 나는 학교 마치고 와서 아빠와 동생 그리고 내가 먹을 밥을 차리고, 틈틈이 빨래, 청소 등 집안일을 했다. 일하는 엄마와 집안일을 분담한 것뿐인데 저녁 시간에 동생을 챙기고 공부까지 하려니 몸이 지쳤다. 집이 더 어려워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과 불안감에 심적으로도 힘들었다. 다행히 천국 소망이 있었기에 오래 흔들리지 않고 무사히 힘든 시기를 이겨냈다. 하나님 은혜로 집안 형편도 조금 나아졌다. 이제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항상 엄마가 밝게 맞아준다. 너무 행복하다.
그 짧은 한 달이란 시간 동안 내가 느낀 것은, 엄마의 자리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고, 누구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 달이었지만, 엄마는 학창 시절 내내 이렇게 지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고, 항상 나와 동생 옆에 있어주려는 엄마에게 고마웠다.
현모양처가 되고 싶다던 엄마의 어릴 적 꿈은 이뤄졌을까? 엄마는, 나와 동생이 성경으로 교육받고 하나님 축복 속에 행복한 가정이 이뤄지니 꿈을 이루었다고 감사해한다. 나도 감사하다. 엄마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하늘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도 넘치도록 받으며 살아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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