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일대기

‘엄마’란 일반적으로 자신을 낳아준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다.
엄마는 자녀를 낳기만 하지 않는다.
자녀가 잘 성장하도록 옆에서 돕고 응원한다.
우리 엄마가 딱 그렇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엄마의 삶을 구체적으로 적어본다.

1. 인물 정보

이름 ‘윤봉희’.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향은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이다.

2. 가족 정보

엄마는 첫째 언니(나의 이모)와 스무 살, 첫째 오빠(나의 삼촌)와 열여덟 살 차이가 난다. 둘째 언니와는 열두 살, 둘째 오빠와는 열 살 차이다. 늦둥이라 언니 오빠들과는 추억이 따로 없다고 한다.
엄마의 아빠(나의 할아버지)는 직장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집에 오셨다. 자린고비에다가 밥상 교육이 엄격하고 고집이 센 분이라, 어릴 적 엄마는 할아버지가 불러도 가지 않을 만큼 할아버지와 거리감이 있었다고 한다.
엄마의 엄마(나의 할머니)는 온화한 분으로, 집에 자주 오지 못하는 남편 대신 자식 뒷바라지를 하셨다. 한번은 첫째 언니가 아기를 낳아서 산후 조리를 도우러 서울까지 가셨다고 한다. 어린 엄마를 집에 두고서 말이다. 엄마는 많이 서운했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할머니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한다. 할머니는 당신보다 자녀들의 삶을 우선시하고, 자녀들에게 더 못 해줘서 미안해하셨다고 한다.

3. 어린 시절

어릴 때 생각나는 일이라고는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일, 할아버지가 매년 어린이날에 사 오신 과자 세트 정도다.

4. 타향살이

편안한 어린 시절을 보낸 엄마는 엄마의 첫째 언니와 형부의 권유로 20대 초반에 서울로 이사했다.
30대 초반, 결혼하고 군산에 정착했다. 처음에는 군산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군산에 내려왔을 때 논밭만 있고 문화시설이 없어서 충격을 받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환경이다 보니 적응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군산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5. ‘엄마’ 윤봉희

엄마는 첫째인 나를 낳고 몸조리를 잘 하지 못했다. 1년 후 둘째를 낳았고 이때도 건강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당시 아빠는 회사 일이 바빠, 엄마 혼자 두 아이를 돌볼 때가 많았다. 명절에도 우리를 보살피느라 친척들이 모이는 큰집에 가지 못하셨다.
시간이 흘러 나와 여동생이 유치원에 갔다. 엄마가 겨우 한숨 돌리려는 때쯤, 막내가 생겼다. 엄마에게는 셋째를 낳을 만한 몸과 마음의 여력이 없었다. 막내가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엄마는 아이를 지키려고 애썼다. 결국 막내가 무사히 태어났다.

부록. 첫째 아들이 말하는 엄마

어릴 때 나는 말썽꾸러기여서 엄마에게 자주 혼났다. 엄마가 나를 미워해서 혼낸다며 엄마의 사랑을 의심했고, 엄마의 애정만 받는 막내를 시기했다.
지금은 엄마 마음이 이해된다. 내가 한창 말썽 피울 때 막냇동생은 아기였고 귀여움을 받을 나이였다. 어렵게 태어난 만큼 엄마가 막내를 더 신경 쓰고 챙기는 것은 당연했다. 엄마는 내가 엄마의 사랑을 오해한 것을 안 뒤로 “엄마는 공평해”라고 말하며 내게 사랑한다고 자주 표현해 줬다.
엄마는 매일 온몸이 아프다고 말한다. 자식들을 어렵게 키우신 할머니가 생각난다면서. 하지만 우리 때문에 힘들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덕분에 힘 난다며 묵묵히 당신의 일을 해내는 사람이 바로 우리 엄마다.
우리를 낳고 기르는 시간이 힘들었어도 우리가 있어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엄마. 딱히 해드린 것 없는데도 우리를 보면 행복하다는 엄마. 아마 이 세상 모든 엄마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고3인 내가 성인이 되기까지 1년도 남지 않았다. 공부와 하나님 일 모두 열심히 해서 엄마에게 행복을 안겨드리는 효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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