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탕자전 下

05

“여보세요?”
현석이 전화였다. 친하긴 하지만 요즘에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정은수, 잘 지냈어?”
“어…. 근데 무슨 일이야?”
현석이는 약간 망설였다.
“너… 집 나왔지?”
“….”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래. …많이 힘들지? 집에는… 언제 들어갈 거야?”
“집?”
기분이 이상했다.
“아직은… 들어갈 생각이 없어.”
“빨리 집에 들어가라. 전에 엄마 심부름 때문에 너희 집에 갔는데, 너희 엄마 눈이 빨갛더라. 아무래도 우신 것 같아. 우리 엄마도, 너희 엄마가 너 집 나가서 맘고생 엄청 하신다고 하더라.”
머리가 복잡했다.
“그 얘기하려고 전화한 거야?”
“…이제 들어갈 때 됐잖아.”
그동안 애써 참아왔던 감정들이 복받쳐 올라왔다. 집을 나온 순간부터 잊으려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잘못했다는 걸.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날 용서해 주실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니, 한 번은 없었던 일로 해주실까?
“나… 가도 되는 걸까?”
“부모님도 널 기다리셔. 분명 용서해 주실 거야.”
현석이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 나는 너무 두려웠다.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미 이만큼이나 왔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집을 나왔을 때는 나 혼자서도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드에서 돈을 인출해서 내 마음대로 썼을 때 특히 그랬다. 그런데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게 뻔뻔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가고 싶다. 다시… 부모님을 보고 싶다.
문자가 왔다. 정찬이었다.
-어디?
-운동장
-빨리 와
-어디를?
-PC방
‘PC방’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울렸다. 그래, 이 모든 일의 시작은 그날 문자에서부터였다.

06

정찬이 문자를 받고 나갔던 그날, 난 설렜다.
“일단 뭐부터 좀 먹자.”
밥을 먹어도 돌아서면 배고픈 게 학생이라는 말이 맞았다. 집에서 밥을 먹고 나왔는데도 배가 고팠다. 편의점에서 라면을 사 먹었다.
“이제 어디 갈 거야?”
“PC방 가자.”
애들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나는 PC방을 좋아하지 않았다. 가면 담배 냄새가 배고, 험악한 욕도 들렸다.
“꼭 가야 돼?”
“가기 싫어?”
“응.”
“그럼 갈 데가 없어. 거기 말고 갈 데 있어?”
아이들은 당연히 PC방에 가야 한다는 듯이 말했다.
“가 보면 재밌다니까.”
정찬이가 내 손을 잡아 끌었다.
PC방의 모든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게임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다. 나는 게임에 몰두해 정신이 없었다. 노래방에 가서도 애들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를 때 굉장히 시끄러웠다. 하지만 화려한 화면과 효과에 마치 물속에 잠기듯 빠져들었다. 이러한 충격의 시간 속에서 난 헤어나지 못했다.
이것이 시발점이었다.
-아니, 안 갈 거야
-왜
-다시는 안 갈 거야
-왜? 무슨 일 있어?
-재미가 없어져서
-갑자기 무슨 소리?
더 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집으로 무작정 뛰었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마음속에 답답한 공기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달리는 동안 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07

집에 도착했다. 하지만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 손이 떨렸다. 분명 집에 왔는데 들어갈 수가 없다.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내 앞에 커다란 벽이 있는 것 같았다.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 옆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엄마가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모양이다.
“그만 울어.”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귀를 벽에 붙여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언제 올까요?”
“가까운 데 있을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엄마, 아빠가 날 걱정하고 있었다.
“힘내자고. 그래야 찾아.”
“그렇겠죠?”
“그래. 그러니까 울지 마, 당신.”
나 때문이라는 죄책감이 들었다. 오늘은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찜질방으로 향했다.
이 밤은 기억하기 싫은 밤이다.
찜질방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달리 갈 곳도 없어서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PC방으로 향했다. 나도 저랬는데. 그때는 그저 같이 있는 게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곁에 아무도 없는, 외톨이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울었다. 멈출 수가 없었다. 그동안 쌓여 있던 게 폭발하는 느낌이다.
집을 나온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같이 좋지 않은 기억들이었다. 단지 후회라는 글자만 남아 있었다. 이제 후회는 그만하기로 했다.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08

숨지 않겠다.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로 했다. 나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나는 내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집을 나왔을 때도 누구나 할 수 있다면 잘못된 건 아니라고 합리화했다. 현석이 말을 듣고 집에 갔을 때,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 건 내가 잘못했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자존심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가 차려주신 밥을 먹고, 학교에서 친구들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집에 와서 부모님과 같이 웃는 게 행복이었다. 내가 있던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 행복을 다시 찾아야 한다.
띵동
설레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토록 기다리던 목소리.
“저, …저예요.”
“누구라고?”
“은수요, 정은수!”
덜컥 하고 문이 열렸다.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은수야!”
“엄마!”
난 엄마 품에 안겼다.
“정말 우리 은수 맞니?”
“무슨 일이야?”
아빠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빠의 얼굴은 많이 피곤해 보였다.
“은수 왔어요, 은수!”
아빠가 나를 부둥켜안았다.
“엄마, 아빠. …너무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부모님은 말없이 내 등을 두드렸다.
“잘 왔어, 은수야.”
엄마 품에 안겼을 때 알았다. 나를 기다려주셨다는 걸.

나는 옷을 갈아입고, 씻고, 엄마가 해준 밥을 먹었다. 따뜻했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난 다시 돌아왔다.
부모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아빠, 엄마. 나를 미워하지 않고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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