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는 게 없어

×월 ×일 화요일

내가 가장 잘하는 것.
참으로 난해하도다.
1+1=2
이렇게 딱 떨어지는 수학이 차라리 쉽겠다.
진로 선생님은 하필 이런 걸 발표시켜가지고오옷~
진짜 창피했다. 다들 멋들어지게 말하더만 나는 “먹는 걸 잘해요”라고 말했으니.
앗, 유머를 잘하는 건가? 아이들에게 큰 웃음 줬으니까.
에효. 딱히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체육, 미술, 음악에도 소질이 없다.
고등학생이나 돼서 진로도 못 정하고.
아~~~ 그냥 물처럼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다!


×월 ×일 목요일

음악 실기 수행평가를 했다. 자기가 자신 있는 악기를 ‘아무거나’ 가져와서 원하는 곡을 ‘아무거나’ 연주하는 거였다.
선생님이 점수를 퍼주고 싶으신 것 같은데, 원래 ‘아무거나’가 가장 어려운 법이다.
어릴 때부터 친구들이 피아노 학원이다, 영어 학원이다 이리저리 끌려다닐 때
‘놀 수 있을 때 놀아야 한다’는 부모님의 교육 철학에 힘입어 자유를 만끽하던 나였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 철천의 한이 될 줄이야.
현란하게 피아노 치고, 눈 감고 바이올린 켜고, 자기 몸이 악기라고 노래 부르고….
그냥 그랬던 반 애들이 완전 달라 보였다.
입 벌리고 감상.
나는 초등학교 때 쓰던 리코더를 책상 서랍 구석에서 찾아
불후의 명곡 ‘할아버지 시계’를 불었다.
단소도 못 부는데 리코더마저 없었다면 난타 공연할 뻔.
리코더를 만든 머나먼 서양의 조상에게 경의를,
책상을 잘 정리하지 않음으로 리코더를 몇 년 동안 서랍에 방치한 나에게 박수를.
아, 됐고! 이번 주에만 의문의 2패.


×월 ×일 금요일

점심시간에 복도에서 진로 선생님과 딱 마주쳤다.
“오늘도 먹는 거 잘했니?”
Oops. Oh, No~~!!
잘하는 게 없어서 그렇게 말했다고 하니 선생님은 역시나 교과서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럼 좋아하는 걸 해봐.”
Oops. Oh, No~~!!
좋아하는 일을 해라, 잘하는 일을 해라….
쌤! 그걸 누가 모르나요! 내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을 모르겠으니까 문제지요!
라고 얼마나 외치고 싶었는지.
좋아서 하는 것보다 시켜서 하는 것이 더 많은 삶이다.
공부도 시키니까 한다.
앗, 아니지. 지금은 안 시켜도 공부한다. 다다음 주 시험이야아아악!!!

×월 ×~×일 n요일

시험 기간.
2주간 일기는 쉽니다.
I’ll be back.

×월 ×일 목요일

시험 끝!!!!!
룰라룰라룰라 뿜빠뿜빠뿜빠
이번 주 놀래. 일기장도 놀아라~


×월 ×일 월요일

단순한 월요병인가, 시험 후 허탈감인가, 가채점 폭망…이 아니라 허망함인가.
하루 종일 멍했다.
우리 반 ‘일등이’ 류소원. 걔는 이번에도 일등 같더만. 부럽다.
소원아, 나도 너처럼 뭐든 잘하는 게 소원이다. ㅜ.ㅜ


×월 ×일 수요일


귀하디귀한 자유 시간, 애들이랑 진로에 대한 심오한 탐색을 했다.
이 얼마나 엄숙한 일인가. 지금 생각하니 놀지도 않고 장하군.
일등이 류소원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애가 딱 부러져서, 하고 싶은 일도 분명할 줄 알았는데
자기도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고민이라는 거다!
아니 그러면 난 어쩌라고. ㅠ_ㅠ
일등이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자기도 잘 모르니까 일단 뭐든 열심히 하는 거라 했다.
공부하고, 책 보고… 그래서 자기가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찾고 싶다고 했다.
지금이야 다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도드라지게 잘하는 게 없어서 더 힘들다고.
일등이만이 아니었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딱 뭘 하겠다고 정한 아이는 얼마 없었다.
당근 나 포함.
어른이 되면 다 해결될까? 아니면 계속 고민하게 될까?


×월 ×일 금요일

담임 선생님이 자습 시간에 뜬금없이 롤링 페이퍼를 시켰다.
반 애들 한 명 한 명의 장점을 적는 것이었다.
별로 안 친한 애들까지 한 학기의 기억을 끌어모아 성심성의껏 적었다.
정성 다해 적은 이유가 있긴 하다. 애들이 내 롤링 페이퍼를 대충 적을까 봐
최선을 다해 적는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흐흐.
두근두근하며 돌려받은 내 롤링 페이퍼에는 기대 이상으로 좋은 글이 빼곡 찼다.

나에게 이런 점이?
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헤헤헤, 좋아.


×월 ×일 일요일

신나는 일요일! 공부와 숙제에서 해방된 완벽한 휴일!
그러나 나는 안다.
내일… 성적표가… 나오리라. 으으윽.
우울하다.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 학교가 오늘 뿅 하고 사라졌으면.
아, 시간이여. 이대로 멈추어다오!


×월 ×일 월요일

성적표 나왔다.^^^^^^^^^^
누군가 말했지. 나는 수긍이 빠르다고.
후후후후. 맞다. 나는 수긍하였다!
나는 모르는 것은 확실히 모른다고 답하기에 틀린 것뿐이다!
그리고 성적은 행복순이 아니잖아!
아니 지금 내가 뭐라고 적은 거야. @ㅁ@
엄마 아빠는 언제나처럼 담담하다. 내 성적이 언제나처럼 담담해서인가?
아버님 어머님, 불효녀는 잡니다.

×월 ×일 금요일

방학이닷!
방학에도 보충 수업받으러 학교 가야 하는 건 우울하지만, 모레 외할머니 댁에 간다!
시원한 강원도! 할머니의 음식 대잔치!
자유를 누리세~


×월 ×일 일요일

오늘 할머니 집에 왔다.
오자마자 계속 먹었다. 할머니, 알 럽 쏘 마치.
배부르니까 잠 온다.
여기서도 일기를 쓰는 내가 대견.
참 꾸준한 나를 칭찬해.


×월 ×일 화요일

삼촌이 물었다.
“어떻게 살고 싶어?”
엄청 신선. 엄청 뜨끔.
내가 너무 할머니 집에서 빈둥댔나. 왜 그런 말을? ――;;;
하긴 할머니 집에서 한 일이라고는 먹고 자고 누렁이랑 놀고 먹고 자고 놀고….
그동안 뭐 하고 싶냐, 뭐 되고 싶냐는 말만 들어봤다. 그런데 ‘어떻게’라니?
나는 그냥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웃음 주면서 살고 싶다.
대단하지 않아도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는 사람? 아, 몰라 몰라!
삼촌의 다음 질문을 받지 않으려면 내일은 놀지 말고 뒷산이라도 올라갔다 와야겠다.
사흘 만에 살도 오른 듯. 포동포동~ 헉, 피둥피둥인가. (՞• (oo) •՞)?


×월 ×일 수요일

와, 인간 승리 강미유!
악 소리가 난다는 그 악산, 치악산을 등정했도다!
그러나 지금 체력 바닥.
오늘 일기를 내일로 미루자.


×월 ×일 목요일

*어제 줄거리
이른 아침, 사촌 김가을 양과 뒷산에 오른 강미유.
그녀는 할머니 집 뒷산이 그냥 동산인 줄 알고 무턱대고 올라갔다가
중간쯤 가서야 그 뒷산이 우리나라 5대 악산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랬다. ㅜ_ㅜ
하지만 힘들다고 그냥 내려가기는 너무 아까웠다.
가을이는 중간에서 쉬고, 나는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의지와 달리 내 행색이 너무 초췌했는지 지나가던 아저씨 아줌마가 과자를 주셨다.
땀 날 때는 짭짤한 과자가 최고라면서. 정말 맛있었다.
짠심으로 나는 오르고 올랐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상에 입성!
올라갈 때는 풍경이 전혀 안 보였는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진짜 절경이었다.
과자를 주고 유유히 사라지신 아저씨 아줌마도 정상에 계셨다.
나를 보고 엄청 칭찬해 주셨다.
“여기까지 올라온 학생은 별로 못 봤다” “인내심 있다” “뭘 해도 잘할 거다”…
표정 관리 잘했나 몰라, 헤헤헤. 일 년치 칭찬을 어제 다 들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더 힘들었지만 왠지 힘이 났다.
앞으로의 일도 그러지 않을까 싶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뭐든 이룰 수 있다고.


×월 ×일 금요일

Come back home!
아이고, 아직도 다리 알이 빵빵하다.
그래도 뿌듯하다. 왠지 큰일을 이루고 돌아온 느낌?
아, 다음 주부터 보충수업도 돌아오는구나.
뭐 치악산도 정복했는데 보충수업을 정복 못하랴.
일등이처럼 나도 열심히 배워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 찾아봐야겠다.
포기하지 않으면 분명 찾을 것이다.
그러니 고민할 수 있는 지금을 즐겨볼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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