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야 속에 담긴 사랑

집에 일찍 들어갔다. 내일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빨리 씻고 자야겠다는 생각에 옷을 허물처럼 벗어 던지고는 욕실로 향했다.
욕실의 차가운 공기가 나를 맞이했다. 그 기운이 싫어 샤워기를 틀고 따뜻한 물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마음속으로 30을 세고 60까지 셌는데, 이상하다.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다.
“엄마, 따뜻한 물이 안 나와!”
추운 나머지 짜증 섞인 말투로 엄마에게 투덜거렸다.
“맞나(‘그래?’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 아까 아빠 씻을 때도 뜨신 물 안 나온다 카든데. 아직 안 나오나?”
“빨리 자야 되는데 이게 뭐야. 추워.”
오들오들 떨리는 몸은 온기를 원했으나 샤워기는 찬물만 뱉어냈다.
참 운도 없다.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이러는 거야. 샤워기를 원망스레 쳐다보고 있는데 엄마가 벌컥 욕실 문을 열었다.
“아이고, 물이 왜 이러나. 여보, 물이 아직 차가운데?”
쪼그려 앉아 떠는 내 모습에 엄마는 애가 타나 보다.
“쫌만 기다려봐라. 부엌에서 물 데워 올게.”
언제 물을 데워서 샤워를 할 수 있을지, 답답하기만 하다.
“어? 부엌에는 따뜻한 물 나온다. 있어 봐라. 대야에 부어서 갖다 줄게.”
아, 다행이다. 그게 어디야.
빨리 몸을 녹이고 싶었던 나는 또다시 숫자를 세며 엄마를 기다린다. 아니, 따뜻한 물을 기다린다.
낑낑대며 따뜻한 물을 들고 들어오는 엄마. 커다란 대야에 물을 붓고 다시 따뜻한 물을 받아오겠다며 부엌으로 바삐 간다. 허리 아플 텐데…. 좀 미지근해져도 괜찮겠지.
엄마가 욕실에 들어왔다.
“찬물을 거따 부으면 어떡하노. 물 다 식는다. 하지 마라.”
“괜찮아요, 물 많아지고.”
“안 된다. 하지 마라.”
대야 속 물이 많아지면 왔다 갔다 할 횟수도 줄어들 텐데 감기 걸린다며 하지 말라 한다.
“옥상 보일러실 좀 갔다 올게. 뭐 고장 났는갑다.”
밖에서 아빠 목소리가 들린다.
“알았어요. 어두우니까 조심하고.”
나 때문에 엄마 아빠가 바빠진다. 당신들은 찬물로 씻었을 텐데 혹여나 내가 감기에 걸릴까 봐 포근한 거실 장판을 벗어나 딸을 위해 움직인다. 머리가 숙여지고 가슴이 뜨거워진다.
대야 속에 담긴 물이 너무 소중해 보인다. 쓰기 아까울 정도로.
아빠가 집에 들어오고, 내게 샤워기를 틀어보라고 한다. 따뜻한 물이 나온다.
“따뜻한 물 나오나?”
“응. 나와요.”
그것도 잠시,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차가운 물이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하지만 따뜻한 물이 안 나온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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