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터너

하늘초등학교에서는 매년 피아노 연주 대회가 열려요. 그런데 올해는 특별한 규칙이 생겼어요.
“페이지터너요?”
4학년 3반 아이들 얼굴에 궁금증이 가득했어요.
“네, 페이지터너는 연주자 옆에 앉아서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이에요. 올해부터는 연주자와 페이지터너, 2인 1조로 대회에 참가하는 것도 허용하기로 했어요.”
“페이지터너는 악보만 넘겨주면 되니까 쉽겠네요?”
“쉬워 보이지만 페이지터너의 역할은 아주 중요해요. 연주자와 호흡이 안 맞아 악보를 제때 넘기지 못하면 연주를 망치니까요. 연주자와 연습을 많이 해야 돼요.”
“아~!”
“대회에 나갈 사람은 내일까지 선생님한테 말해주세요.”
“네!”
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피아노 대회 이야기로 소란스러웠어요.
“하아.”
한숨의 주인공은 다연이예요. 다연이는 피아노를 아주 잘 쳐서 매년 피아노 대회를 나갔었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피아노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반갑지 않았어요. 며칠 전, 체육 시간에 공놀이를 하다가 손가락을 다쳤거든요. 왼손에 붕대를 감아서 당분간 좋아하는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었지요. 세희가 다연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어요.
“다연아, 나랑 같이하자!”
세희는 다연이와 단짝 친구예요. 다연이가 손을 다쳐 피아노를 못 친다고 울 때 함께 슬퍼했었지요.
“연주는 못 해도 악보는 넘길 수 있잖아. 내가 너보다 피아노는 잘 못 치지만 네가 내 페이지터너 해주면 힘이 날 것 같아. 같이 대회 나가자!”
“정말? 고마워. 내가 악보 잘 넘겨줄게!”
다연이는 세희가 고마웠어요. 그리고 페이지터너로라도 피아노 대회에 나갈 수 있어서 기뻤어요.
다연이와 세희는 방과 후마다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연습했어요. 다연이는 세희의 연주를 따라 악보를 넘겨주고, 틀린 부분을 자세히 알려줬어요.
“다연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오늘 알려준 부분은 집에서 연습해 올게.”
“응, 나도 페이지터너 하는 거 재밌어. 내일 보자!”
다연이는 연습 때마다 세희가 연주를 잘할 수 있도록 연주법을 가르쳐주었어요. 하지만 몇 번을 설명해도 세희는 실수를 반복했어요.

“여기 또 틀렸잖아. 악보 좀 잘 봐.”
“미… 미안.”
“아, 정말. 다시 해보자.”
시간이 지나도 늘지 않는 세희의 연주 실력 때문에 다연이는 답답했어요.
“여기는 통통 튀는 느낌을 살려야지. 박자는 끝까지 채우고, 페달 빨리 떼.”
세희는 점점 다연이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어요.
“손 좀 빨리 움직여 봐. 박자가 늘어지잖아.”
“네 팔이 자꾸 닿아서 그런 거야. 옆으로 좀 가.”
“악보를 넘기려면 어쩔 수 없어. 네가 팔을 벌리고 쳐서 그래. 그렇게 치면 안 된다니까?”

다연이와 세희는 연습 시간만 되면 목소리를 높였어요.
“벌써 악보를 넘기면 어떡해! 여기 말고 다음 마디에서 넘겨야지.”
“안 돼. 그럼 너무 늦어.”
“나는 안 늦어! 페이지터너가 연주자한테 맞춰야지.”
다연이는 자존심이 상했어요. 피아노 건반을 눌러보지도 못하고 간이 의자에 앉아 악보만 쳐다보고 있는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졌어요. 늘 붙어 다니던 세희와 집에 따로 가는 날이 많아졌지요.
피아노 대회를 일주일 앞두고 선생님이 대회에 참가하는 아이들을 불렀어요.
“대회 준비 열심히 하고 있니? 한 가지 전달 사항이 있어. 페이지터너들은 대회 날 검은색 옷을 입고 오렴. 입장과 퇴장은 연주자가 한 뒤에 하고, 무대 위에서는 악보를 넘길 때 말고는 있는 듯 없는 듯 가만히 있어야 해. 페이지터너는 연주자의 그림자와 같단다.”
‘무대에서 없는 사람처럼 있으라고? 연주도 못 하고, 박수도 못 받고, 저번에는 세희한테 무시까지 당하고. 이게 뭐야?’
잔뜩 뿔이 난 다연이는 페이지터너를 하기 싫었어요.
방과 후, 다연이와 세희는 피아노 연습을 하며 또 싸웠어요. 세희가 화를 참지 못하고 말했어요.
“나 너랑 안 해! 나 혼자 대회 나갈 거야. 괜히 너랑 같이 한다고 했어. 난 페이지터너 필요 없어!”
“흥! 나도 하기 싫었거든?”
다연이는 가방을 챙겨 음악실을 나갔어요. 하기 싫었는데 잘된 일이었지요. 복도를 걸어가다 담임 선생님과 마주쳤어요.
“지금 집에 가는구나? 그런데 세희는?”
“혼자 연습 중일걸요. 저랑 대회 나가기 싫대요.”
다연이는 고개를 숙이고 뾰로통하게 대답했어요.
“그래? 다연아, …선생님이랑 코코아 마실래?”
다연이는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과 마주 앉았어요.
“세희랑 무슨 일 있니?”
“그게… 제가 어떻게 쳐야 된다고 알려줘도 안 듣잖아요, 계속 틀리기만 하고. 그러더니 오늘은 저랑 대회 안 나간대요. 어차피 저도 페이지터너 하기 싫었어요. 나중에 피아노 대회 열리면 혼자 나갈래요. 저 혼자 하면 더 잘할 거예요.”
다연이의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이 말했어요.
“다연아, 그거 아니? 훌륭한 연주자 중에는 페이지터너를 한 사람이 많단다.”
“네?”
“페이지터너는 악보를 잘 숙지해야 하고 연주자의 마음을 헤아려야 해서 피아노를 잘 아는 사람들이 해. 페이지터너가 잘 해야 연주자가 마음 편하게 연주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페이지터너를 숨은 연주자라고도 하지.”
“숨은 연주자요?”
“그래, 숨은 연주자. 다연이가 피아노를 직접 못 쳐서 아쉬워하는 건 선생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좋아하는 피아노 연주를 누군가가 잘하도록 도와주는 것도 멋진 일 아닐까?”
다연이는 마음이 조금 흔들렸어요. 그렇지만 이미 세희와 대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싸워서 고민됐지요. 다연이는 집으로 돌아가 엄마에게 고민을 털어놨어요.
“다연아, 드러나지 않는 일이라고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다연이가 세희를 도와 연주한다면 정말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세희가 다시 저랑 해줄까요?”
“그럼! 이번에는 다연이가 세희한테 먼저 같이 하자고 말해 봐.”
다연이는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어요.
“엄마, 제가 페이지터너를 잘할 수 있을까요?”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면 잘할 수 있을 거야.”
“배려요? 어떻게요?”
“음… 아빠 엄마처럼 해보는 건 어떨까? 아빠 엄마는 다연이가 하는 말을 들어주고, 걸음이 느린 다연이랑 맞춰 걷고, 잘할 거라고 칭찬도 해주잖아. 페이지터너로서 연주자에게 모든 걸 맞춰보렴.”
다연이는 세희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어요. 그리고 세희의 상처받은 얼굴도요.
“다연이는 세희의 페이지터너고 둘도 없는 친구잖아. 할 수 있지?”
“네, 엄마. 열심히 해볼게요!”
엄마는 다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어요.

다음 날, 다연이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가려는 세희를 불렀어요.
“세희야!”
“왜?”
“미안해. 너한테 막 나쁘게 말하고 짜증 내서. 진심은 아니었어.”
세희는 먼저 사과해 준 다연이가 정말 고마웠어요.
“아니야. 내가 미안해. 사실 너보다 피아노를 잘 쳐야 한다는 생각에 힘들었거든. 너랑 하기 싫다고 말하고 나서 엄청 후회했어.”
“그럼… 나랑 같이 대회 나갈래? 진짜 페이지터너 열심히 해볼게!”
“당연하지, 연습하러 가자!”
다연이와 세희는 손을 꼭 잡고 음악실로 향했어요. 다연이는 전처럼 조급해하지 않고 짜증도 내지 않았어요. 묵묵히 연주를 들어주고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어요. 세희의 연주 실력이 며칠 새 눈에 띄게 좋아졌어요.
“세희야, 진짜 좋다!”
다연이가 세희에게 엄지를 들어주었어요.
“네가 옆에 있으니까 마음이 편해져서 더 잘 쳐지는 것 같아.”
“네가 연습을 많이 해서 그래. 악보 넘기는 속도는 어때? 빠르진 않아?”
“아니, 딱 좋아!”
맑고 고운 피아노 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다연이와 세희의 대화가 음악실을 가득 채웠어요.
피아노 대회 결과는 어떻게 됐냐고요? 아쉽게도 다연이와 세희는 상을 받지 못했어요. 하지만 상보다 더 좋은 선물을 받았지요.
“우리 앞으로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
“당연하지!”
‘배려’라는 큰 선물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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