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주는 약 上


“딸! 약 사왔다.”
“응? 웬 약?”
“네가 요즘 하도 우울해 보이고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사 왔어.”
“무슨 약인데?”
“이 약이 아주 신비한 효능이 있대.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한 일들이 생긴다는 거야. 그러니까 하루에 한 알씩 꼭 챙겨 먹어. 맛도 좋아서 먹기 괜찮을 거야.”
딱 봐도 그냥 비타민제다. 엄마도 참, 내가 이제 꼬맹이도 아닌데 그런 말에 혹할 줄 아나.
하나 입에 넣어보니 달고 맛은 있다.
“어때? 맛있지? 기분도 막 좋아지지 않아?”
아, 내가 진짜 엄마 때문에 웃는다.

꿈을 꾸었다. 학교에서 지혜와 싸웠던 일이 꿈에 나왔다. 지혜가 실수로 내 필통을 떨어뜨렸고, 나는 버럭 화를 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안 좋았던 나는 심한 말을 퍼부었다. 지혜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로 가는 내내 꿈이, 그 일이 생각났다. 교실에서 다른 친구들과 열심히 수다를 떨어도 계속 지혜가 신경 쓰였다. 오늘은 꼭 사과를 해야겠다.
점심시간.
“지혜야.”
“왜?”
지혜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당연한 반응이다.
“…미안해. 내가 그때 기분이 안 좋아서 너무 예민하게 굴었어. 미안해.”
지혜는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내가 말을 잘못했나? 아니면 나랑 다시 말하기 싫을 정도로 화났나?
집으로 가는 길, 학교에 놓고 온 과제 노트가 생각났다. 짜증을 내며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런데 교실에 누군가 앉아 있다. 지혜다. 어떡하지? 에라, 모르겠다.
“지혜야! 왜 아직도 학교에 있어?”
“어? 아, 그게….”
지혜는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근데 손으로 뭔가를 가린다. 힐끗 보니 편지인 것 같다. 가만, ‘To. 혜미’?
나한테 쓰는 편지다!
놀라서 지혜 얼굴을 보니, 내가 눈치챈 걸 지혜도 눈치챈 모양이다.
“고마워서. 너한테 편지 쓰려고….”
“…고맙다고? 뭐가?”
“나는 네가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어.”
맞는 말이다. 그 일은 벌써 한 달도 더 지난 일이니까.
“네가 사과했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교실을 나간 거야. 너 엄청 무안했지? 미안해. 먼저 말 걸어줘서 고마워. 이 말을 편지에 쓰고 있었어.”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나는 그냥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지혜가 활짝 웃는다.
우리는 집으로 가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예전보다 지혜와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날씨가 찌뿌드드해서 그런지 좀 피곤하다. 오랜만에 약 좀 먹어볼까?
엄마가 사다 준 비타민제는 언제부터인가 내 책상만 지키고 있었다. 엄마가 매일 먹으라고 했지만 엄마와 싸운 뒤에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또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엄마와 싸웠던 일이 꿈에 나왔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며칠 후였을 거다. 시험을 잘 봐서 좋고, 친구들과 놀 생각까지 하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나는 그날이 학원에 가는 날인지도 완전히 까먹고 신나게 놀다가 집에 들어갔다. 학원 선생님의 전화를 받은 엄마는 잔뜩 화나 있었다. 시험도 끝났는데 학원 한 번 안 갔다고 혼내는 엄마에게 서운하기만 했다.

어제부터 날씨가 그 모양이더니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다행이다, 집에 도착하고 내려서. 아! 엄마는 우산 안 갖고 나갔는데.
엄마는 근처 고등학교 급식실에서 일한다. 고등학교는 석식도 있어서 엄마는 밤 9시쯤 집에 들어온다. 엄마가 학생들이 반찬을 너무 많이 남긴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맛없으니까 남기지”라고 말한 뒤부터 엄마는 레시피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열심히 일하는 엄마가 보기 좋았지만, 이 요리 저 요리를 만들어서 자꾸 맛보라고 주는 엄마가 점점 짜증스러웠다.
우산을 들고 엄마가 일하는 학교로 찾아갔다. 석식 시간이라 급식실에 사람이 많았다. 엄마 말대로 고등학생 언니들은 대부분 밥을 반 이상 남긴 채 버렸다. 엄마는 가득 찬 음식쓰레기통을 옮기고, 식판들을 치우고 있었다. 순간 울컥해서 눈물이 고였다. 조용히 급식실 안쪽으로 들어가 엄마 가방 옆에 우산을 놓고 나왔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나는 책상에 가만히 앉아 공부만 하면서 엄청 큰일이라도 하듯이 엄마에게 생색내고, 조그만 일에도 기분 나빠하고 화를 낸다. 엄마에게 해준 것도 없으면서.

오늘은 개교기념일! 푹 자고 일어나니 엄마는 일하러 나가고 밥만 차려져 있다. 소파에 앉아 TV리모컨을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봤다. 근데 집이 엉망이다. 바닥에 머리카락도 보이고, 설거지와 빨래도 쌓여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결심했다. 우리 집 대청소를 하겠다고.
먼저 설거지를 했다. 엄마가 어제 하루 안 해놓았을 뿐인데 그릇이 이렇게 많나? 내가 설거지를 못해서 많게 느껴지는 건가?
오후 2시. 세탁기가 있는 베란다로 갔다. 엄마에게 들은 건 있어서, 색깔이 있는 것과 색깔이 없는 것으로 빨래를 분리했다. 근데 세제는 어디 있지? 세탁기를 돌려본 적이 없으니 어디에 있는지 알 턱이 있나.
베란다를 뒤져 겨우겨우 세제를 찾아 세탁기에 넣었다. 이제 세탁기를 돌리면 되는데… 무슨 버튼을 눌러야 되지? 세탁기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옆에 붙은 사용설명서를 보고 대충 눌러 세탁기를 돌렸다. 본격적인 집 청소만 남았군. 청소기 돌리고, 바닥 닦고, 가구 닦고…. 드디어 대청소가 끝났다!
소파에 시체처럼 쓰러져 누웠다. 좀 있다 학원에 가야 하는데 온몸의 힘이 다 빠진 것 같다. 엄마가 준 약 좀 먹어야겠다.
엄마가 집안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공부한다는 핑계로, 힘들게 일하고 들어와서 집안일까지 하는 엄마를 모른 척했다. 엄마도 내가 집안일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뭐라 하지 않았으니까. 이 모든 일을 여태까지 엄마 혼자 했다니. 엄마에게 정말 미안하다.


G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