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질 것 같은 이 마음을 어디 털어놓을 수도 없고, 아무리 둘러봐도 말이 통하는 사람도 없다. 애써 누르고 눌러도 마음속에 가득 쌓인 스트레스는 정점에 이르러 폭발하고 만다.
스스로를 절제(self-control)하기는 어렵다. 그것도 생각 많고 혈기 왕성한 십대라면 자기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여기, 사람의 의지로 바꿔볼 수 없는 힘든 상황에서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면서도 자신을 다스린 십대들이 있다. 그들이 부럽다면 한번 따라 해봐도 좋다. 그들의 감정 표출 방법은 ‘글쓰기’였다.
안네 프랑크 “마음속 비밀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안네는 1929년, 독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유대계 독일인이다. 1933년, 나치스가 정권을 잡자 안네의 가족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다시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갔다.안네는 열세 살 생일날, 체크무늬 일기장을 선물 받는다. 안네는 일기장을 ‘키티’라 부르고, 키티에게 편지를 쓰듯 하루하루의 일을 적는다. 공교롭게도 안네가 키티와 만난 1942년은 나치스가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유대인을 색출하기 시작한 때다. 그때부터 일기장은 은신처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안네 가족 네 명은 다른 유대인 네 명과 함께, 안네 아빠의 사무실 건물에 감춰져 있는 비밀 공간에서 숨어 살았다. 그곳은 밖으로 뛰쳐나갈 수도, “날 좀 내버려 두라”고 마음껏 소리 지를 수도 없다. 밖에서는 대포와 총소리가 들리고, 게슈타포(나치스 정권의 비밀 국가 경찰)가 노리고 있다. 안에서 작은 소리라도 새어나갈까 봐 긴장의 연속이다.
사춘기, 가장 예민한 시기에 작은 공간에 갇힌 안네는 번번이 가족들과 다퉜고, 은신처 사람들과도 부딪혔다. 고립된 생활의 스트레스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안네의 숨통은 키티였다.
「키티, 안네는 머리가 이상한 아이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내가 살고 있는 시대도 이상한 시대고, 생활 환경은 더더욱 이상한걸요. 그렇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생각하고 느낀 것을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완전히 숨이 막혀버렸을 겁니다.」
안네는 비참한 생활을 그대로 표현했고, 자신의 느낌을 거리낌 없이 적었다. 귀여움만 받던 철없는 소녀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글을 쓰며 자신을 돌아보고 성숙해진다. 밖에서 죽어가는 유대인들을 생각하면 “천국과 같은 생활을 누리는 것”이라 말하기도 하고, 예전에는 느끼지 못한 사소한 것의 소중함을 느낀다.
「아마 당신도 1년 반이나 갇혀서 지낸다면 종종 견딜 수 없게 될 때가 있을 거예요. 아무리 올바른 판단력이 있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아도 마음 깊은 곳의 솔직한 느낌까지 억누를 수는 없거든요. 자전거를 타고, 춤을 추고, 휘파람을 불고, 세상을 보고, 청춘을 맛보고, 자유를 만끽하고, 나는 이런 걸 동경해요. 그러나 그런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죠. 하기는 우리 여덟 사람 모두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거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지낸다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요?」
안네는 자기 안의 여러 목소리들과 마음껏 소통하며 안정을 찾았고, 살벌한 전쟁 한복판에서도 작가의 꿈을 키웠다. 안네에게 키티는 단순한 노트가 아니라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이자 친구였다.
(※안네의 일기는 1944년 8월 1일로 끝난다. 누군가의 밀고로 은신생활이 발각됐고, 은신처 사람들 모두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안네는 언니와 함께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두 자매는 티푸스에 걸려 사망한다. 은신처 사람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안네의 아빠에 의해 《안네의 일기》가 세상에 알려진다.)
즐라타 필리포빅 “모든 현실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
1993년, 《즐라타의 일기》가 출간된다. 즐라타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에서 생존한 13세 소녀였다.유럽 동남쪽 발칸반도에 있던 유고슬라비아는 1945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모여 성립된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었다. 그러다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가 독립한 후 1992년에는 보스니아도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세르비아가 보스니아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민족 간의 인종 분리 정책을 펼치면서, 대량학살을 시작했다. 바로 보스니아 전쟁(1992~1995)이다.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살았던 즐라타는 안네처럼 자신의 일기장을 ‘미미’라 불렀다. 학교 이야기, 가족 이야기 등이 전부였던 평범한 즐라타의 일기장은 전쟁 후, 하루하루 치열한 생존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곳이 된다.
보스니아는 폭격과 총격에 시달렸다. 즐라타는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총탄을 피해 달려야 하고, 집 지하 대피소에 몸을 웅크려야 했다. 추억이 깃든 장소는 쑥대밭이 되었다. 전기는 끊기고 물은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학교는 다닐 수 없다.
전쟁은 인간성을 상실시키기도 한다. 즐라타 역시 공포와 마주하며 마냥 두려워 떨거나 전쟁에 대한 분노, 증오를 키우며 적개심으로 가슴을 채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즐라타는 학교생활의 그리움과 친구들에 대한 걱정,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는 초조함 등을 미미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며 자신의 마음을 달랬다. 일기를 통해 인간성,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 중 세상에 알려진 즐라타의 일기는 많은 이들에게 전쟁의 참상과 그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생활을 대변하는 큰 역할을 했다.
시간이 흘러 즐라타는 “아이들이 전쟁으로 인해 끔찍한 감정을 품고 성장한다면 언젠가 나라의 운명이 그들 손에 쥐어졌을 때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즐라타는 글쓰기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업적은 흉포한 세상 속에서 이성과 감성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켜낸 것인지도 모른다.
즐라타는 자신의 일기를 읽고, 용기를 얻어 글을 쓰기 시작한 문제아 청소년들을 위해 이런 글을 남겼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무엇이든 적을 수 있고, 어떤 고민도 한없이 들어주기만 하는 일기장은 나의 친구였다. 일기장은 나의 공포와 의문 그리고 슬픔까지 모두 받아주었다. 나는 일기를 통해 글쓰기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하얀 백지 위에 자신을 쏟아부어 감정과 생각을 채우고, 영원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래서 전쟁이 지속된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계속 일기를 썼다. 그것은 내게 모든 현실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자유의 작가들 “절망을 이기는 용기를 가르쳐준 기적의 글쓰기”
즐라타가 글을 남긴 대상, 문제아 청소년들은 1994년 미국 윌슨고등학교 203호 교실에서 탄생한 ‘자유의 작가들’이었다. 자유의 작가들은, 1960년대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자유의 여행자들(Freedom Riders)’을 기리는 의미에서 윌슨고등학교 203호 교실 학생들이 스스로를 부른 명칭이다. 그들의 선생, 에린 그루웰은 괴짜였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문제아들에게 일기 쓰기를 시킨 것이다.학생들 사이에서는 백인과 흑인, 히스패닉(중남미계 미국 이주민과 그 후손을 뜻하는 말) 사이의 골이 깊었다. 태어날 때부터 서로를 ‘적’으로 여겼고, 어린 나이에 벌써 서로에게 총을 겨눴다. 거리에서도, 교실에서도 인종과 계층에 따라 패거리가 형성돼 어디에 가도 살벌하기만 했고, 피를 부르기도 했다. 여기에는 가정 폭력, 성폭력에 다치고 약물 중독에 시달리거나 갱단에 가입한 열등생이 전부였다.
그들이 처음 쓰기 시작한 일기는 짜증과 알 수 없는 증오만이 가득했다. 비뚤어진 세상을, 누군가를 탓하며 욕밖에 할 줄 몰랐다. 하지만 이 열등생들의 일기가 시간이 흐를수록 바뀐다. 누구 하나 자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스스로에게 말하고, 스스로에게 귀 기울이며 자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잘못된 행동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비로소 ‘나’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안네의 일기》, 《즐라타의 일기》를 읽으며 비록 차원은 다르지만 인종차별이라는 ‘폭력’ 속에서 전쟁 중인 자신들을 발견했다. 자유의 작가들은, 다락방에서 안네의 이야기가 탄생하고 지하실에서 즐라타의 이야기가 탄생했듯이 윌슨고등학교 203호 교실에서 인종차별과 편견에 맞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 그들이 가장 먼저 맞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평소의 나쁜 습관을 버렸고, 이유 없이 서로를 향해 겨눴던 총을 내렸다. 대신 잘못된 차별과 선입견을 향해 펜을 들었다.
1998년 가을, 자유의 작가 150명 정원은 당당히 졸업했다. 이후 이들 대부분은 대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전역에 글쓰기 운동을 퍼뜨렸다. 갖가지 폭력에 멍들었던 문제아들은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의 미래를 변화시켰다.
이들의 일기 중 142편은 한데 묶여 출판되었고, 세계 많은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바로 너 “이제 네 마음을 적어 봐”
지금, 우리의 학교도 전에 없던 격한 시기를 맞았다. 학교 폭력, 왕따 문제, 반항, 친구들과의 경쟁 등. 누구나 이러한 환경에 얽매일 수 있다. 하지만 벗어날 수도 있다.특히 사춘기 시절은 자기 삶이 의미를 찾으려고 몸부림치는 때이다. 학교, 학원, 집을 오가는 쳇바퀴 생활이 답답해서 반항하기도 한다. 이러한 자신을 바로 보고, 스스로와 소통할 수 있는 효과적인 통로가 ‘글쓰기’다.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 페니 베이커 교수는 “쓰기는 마음을 청소해 주고, 심리적 상처를 치료해 준다”고 말했다. 실제로, 경험을 글로 쓰면 자신이 제3자가 되어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잘못된 길에 들어서도 돌이킬 수 있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다고 한다.
우리 또한 글쓰기를 통해 상처를 치유한 경험이 이미 있을 것이다. 부글부글 끓던 마음을 종이에 쓰고 나면 다소 진정되기도 하고, 혹은 너무 답답해서 글로 기분을 표현하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기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감정을 그대로 두는 것보다 글로 쓰는 것이 상처 난 감정을 치유하는 시간이 빠르기 때문이다.
잘 쓰려고 할 필요는 없다. 마음속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자유롭게 종이에 털어놓자. 어떤 문제든지 솔직하게 쓰면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는 문을 두드리게 되고, 그 과정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알다시피 일기다. 혹자는 일기를 ‘우리의 내면을 방문하여 스스로 소통하는 기행문’이라고도 했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그날 기억나는 사건이나, 그날 일어난 좋은 일과 잘못된 일을 적어보는 것이다.
기도문이나 편지 형식의 글도 좋다. 누군가에게 나의 걱정과 근심을 말하고 나면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듯이 임의의 한 대상에게 진솔하게 마음을 적는 행위는 내 마음에 긍정적인 영향을 일으킨다.
답답하다고 속앓이만 하거나 괜한 분풀이를 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다. 이제 주저하지 말고 내 마음의 목소리를 적어보자. 자신과의 전쟁, 감정의 폭발에서 자신을 지켜라. 다행히 우리에게는 우리 이야기에 항상 귀 기울여주시는 엘로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가.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말에는 힘이 있다. 진솔한 글로 세상에 울림을 주었던 십대들처럼 이제 나의 마음속에서 나온 말이 나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