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탕자전 上

01

상담이 있어 6시 30분에 학교에서 나왔다. 선생님의 잔소리를 겨우겨우 이겨내니 남는 힘이 없다.
지잉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액정 화면을 보니 엄마다.
“은수야, 어디야?”
“이제 학교 끝났어요.”
“왜 이렇게 늦게 끝났어?”
“선생님이 상담한다고…. 예상보다 늦게 끝났어요. 엄마는요?”
“엄마 오늘 늦게 갈 것 같아. 집에서 라면이라도 끓여 먹고 있어.”
“야근?”
“응.”
“알겠어요.”
요새 엄마는 일이 늦게 끝난다. 10시, 늦게는 12시가 넘도록.
집 안은 캄캄했다. 무겁고 텁텁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불을 켜고 창문을 열었다. 습관적으로 컴퓨터 전원을 켰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시다 보니 자연스레 컴퓨터가 내 친구가 되었다.
요즘은 생각도 많아지고, 가슴이 답답하다. 별일 아닌데도 짜증이 나고, 몸과 마음도 제멋대로다. ‘내 생각은 이게 아닌데’, ‘내 마음은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얼굴을 찌푸리고 버럭 화를 낸다. 이게 바로 사춘기인가? 오는 시기는 다 다르다고 하는데 난 지금, 중학교 2학년 때 온 것 같다.
문자가 왔다. 정찬이다.
-내일 시간 있어?
-무슨 일?
-애들이 만나자는데
-만나서 뭐할 건데?
-여러 가지
-몇 시?
-12시 정도
-안 될 듯;;
-왜
-그냥 좀
-일단 나와
한번 나가볼까?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했다.
-OK 갈게

02

“은수야, 어디니?”
“도서관이요.”
“그래?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말고.”
“알겠어요.”
사실 난 친구들과 PC방에 있었다. 컴퓨터 세계에 빠져 있으면 다른 것은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날 이후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처럼 걷잡을 수 없었다.
집에 들어가는 시간도 점점 늦어졌다. 부모님께는 도서관에 갔다는 등의 거짓말을 했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다가도 ‘다른 애들도 하는데 뭐, 어때’라고 생각하면 답답함이 조금은 풀렸다. 어쩌면 자기최면을 거는 건지도 모르겠다.

똑똑
“네.”
방문을 열고 엄마가 들어왔다. 손에는 콜라가 들려져 있었다.
“은수야, 요즘 별일 없니?”
“네? 네.”
“학교생활 잘하고 있지?”
“네.”
“무슨 문제 있으면 꼭 얘기해야 돼, 알겠지?”
“네. 걱정 마세요.”
“그래, 공부 열심히 해.”
엄마는 내 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엄마의 손길이 가슴을 더 답답하게 했다. 대체 왜 그런 걸까. 콜라에는 얼음이 동동 띄어져 있었다. 콜라는 겉으로 보면 속을 알 수 없는 시커먼 모습이지만 톡 쏘는 자극적인 맛을 가지고 있다. 마치 나처럼.

03

오늘은 특히 기분이 좋았다. 방학했다고 신나게 PC방에서 논 뒤에 애들과 돈을 모아서 피자를 사 먹었다.
“잘 가.”
친구들이 손을 흔들며 집으로 돌아갔다.
집 앞 가로등이 더 어두워진 것 같았다. 하루하루 점점 더 어두워지는 가로등이라니.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다.
“다녀왔습니다.”
집 안에는 왠지 모를 정적이 흘렀다. 엄마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그런데 애써 감추는 것 같았다.
“은수 왔니?”
“네.”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엄마가 내 손을 잡았다.
“엄마랑 잠깐… 얘기 좀 할까?”
“네? 무슨 얘기요?”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방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책상 의자에 앉았다. 엄마가 나를 보는 눈빛은 너무나 슬퍼 보였다.
“은수야, 어디 갔다 왔니?”
엄마의 질문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평소와 같은 질문임에도 오늘은 달랐다.
“친구들이랑 영화 보고… 왔는데요.”
“영화 보고는 뭐했니?”
“피자… 먹었는데요.”
“그게 다니?”
“네?”
“정말 그게 다야? 너 엄마한테 숨기는 거 없니?”
엄마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 순간 직감했다. 엄마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은수 너 요새 대체 어디 가는 거니?”
“도서관….”
“거짓말하지 마! 엄마가 모를 줄 알았니? PC방 가고 노래방 가고, 그러고는 도서관 갔다고 거짓말했잖아. 희수 엄마한테 다 들었다, 아니니?”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결국 일이 터졌구나.
“왜 대답이 없니?”
엄마의 목소리는 더 격정적으로 변해갔다. 엄마의 말이 나를 부수는 것 같았다.
“엄마가 묻잖아.”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뭐?”
“남들도 다 하는 건데 왜 난 못해요? 중학생이면 그 정도는 다 하는 거 아니에요? 나도 하고 싶은 거 한다는데, 왜 못하게 하냐고요!”
“그게 엄마한테 할 소리야?”
“내 말도 내 마음대로 못해요? 왜 이해를 못 하냐고요!”
대체 왜 이런 말이 나오는 걸까.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너 정말!”
“알아요. 거짓말한 거 잘못인 줄 알아요. 근데 PC방, 노래방 다 가는 거 아녜요? 안 가는 애가 이상한 거지.”
“그게 잘못한 사람의 태도야? 그리고 애초에 거짓말을 왜 해? 네가 매일 늦게 들어오니까 걱정돼서 얘기하려고 한 건데….”
엄마의 얼굴에는 분노도 있었지만 슬픔도 있었다. 난… 알 수 있었다.
“나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요. 답답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요!”
몸을 돌려 문을 거칠게 열었다. 충동적인 일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아니 단지 그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너 어디 가?”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고 발걸음을 옮겼다. 서러운 감정이 복받쳐왔다. 눈물을 훔치며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04

도착한 곳은 근처 공원이었다. 나에게는 아무 계획이 없었다. 잠은 어디서 자야 하고 밥은 어떻게 할지 앞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휴대폰을 켜자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이 와 있었다. 문자도 있었다. 아빠가 보낸 문자였다.
-은수야 어디야
아빠도 내가 집을 나갔다는 걸 알았나 보다. “하아” 하고 한숨이 나왔다.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걱정됐다. 부모님 얼굴을 어떻게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숨이 막혀오는 듯했다.
지갑을 열어보니 은행 현금인출카드와 현금 오천 원이 있었다. 카드를 보는 순간 ‘혹시’ 하는 생각에 곧장 은행으로 향했다. 카드를 넣고 잔액 확인을 눌렀다.
150,000원.
엄청난 금액이었다. 난 내 눈을 의심해 눈을 비벼도 보고, 볼을 꼬집어도 봤지만 꿈이 아니었다. 그런데 출금 버튼으로 손이 가지 않았다. 함부로 빼서는 안 될 것 같았다. 10분 정도를 고민했다.
‘이 카드는 내 카드이고, 그렇기 때문에 난 이 돈을 쓸 권리가 있다.’
난 바로 출금 버튼을 누르고 30,000원을 뽑았다. 지갑이 두둑해졌다. 숙식 걱정이 해결됐다.
지잉
액정 화면을 보니 정찬이었다.
“여보세요?”
“어디야?”
“우리 동네.”
“PC방에 올 수 있어?”
“지금?”
“어. 애들도 온대.”
“알았어.”
주머니가 두둑하니 못할 게 없을 듯했다.
PC방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도 옆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본능적으로 게임에 접속했다. 정신없이 빠져들었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우리 라면 먹을래?”
“그럴까?”
친구들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얘들아, 내가 사줄게.”
“정말?”
나는 내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를 꺼냈다. 평소 같으면 하지 못할 일이지만 지금은 가능했다. 어깨가 으쓱해졌다.
라면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어도 네 시간은 한 듯했다. 정신이 멍했다. 눈앞에는 아직도 게임에서 본 화려한 장면들이 보였다. 나와서 아이들과 게임 이야기밖에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전혀 질리지 않았다. 나도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이 들었다.
“잘 가.”
애들은 각자 집으로 갔다. 난 주변에 있는 찜질방으로 향했다. 왠지 모를 허탈감이 들었다.
초등학교 옆을 걸어갔다. 반대편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뒤에도 또 한 사람이 오고 있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난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었다. 쉽게 말하면 포위되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형 다섯 명이 나를 둘러쌌다.
“야.”
“네?”
“돈 있냐?”
“어… 없어요.”
“뒤져서 나오면?”
“네?”
“뒤져서 나오면 어쩔 건데?”
말로만 듣던 ‘돈 뜯기’였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호흡이 가빠졌다.
“잔… 돈은 있는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 세 장을 꺼냈다. 한 형이 획 하고 돈을 채갔다. 머릿속에는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한 명을 밀치고 무조건 뛰었다.
“헉, 헉.”
가슴이 뜨거웠다. 미친 듯이 뛰어서 빌라 앞 벤치에 앉았다. 숨을 가다듬었다.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너무… 무섭다. 너무 외롭고, 힘들다.
전봇대를 봤다. 종이가 붙어 있었다. 실종 전단지였다. 나랑 비슷한 또래다. 날짜를 보니 10년이나 지나 있었다. 아직도 찾지 못한 모양이다. 나도 이렇게 되지 않을까. 내 이름이 적힌 실종 전단지. 물론 종이가 붙기 전에 집에 들어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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