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의 히어로를 찾아라!
분명 평화로운 수업 시간이었다. 선생님 입에서 내 이름 석 자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다음 발표자는… 한지현. 발표 준비 잘 해오도록.”
딩동댕동-.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오늘만큼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소리 같았다. 절망감에 책상에 엎어지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커헉!”
안았다기보다는 목을 졸랐다는 것에 더 가까웠다.
“매점 가자!”
나에게 이런 화려한 레슬링 기술을 선보일 사람은 경윤이뿐이다. 친구가 지금 일생일대 위기에 놓여 있는데 매점 타령이라니. 이 눈치 없는 김경윤. 한숨을 푹 쉬니 경윤이가 목을 조르던 팔을 풀어냈다.
“뭐야, 왜 그래? 발표 때문에?”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경윤이는 매점에 들어서자마자 빵 매대로 달려갔다. 새로운 피자빵이 들어왔다나 뭐라나. 경윤이가 피자빵 쟁탈전을 벌일 때 나는 영화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슬픈 눈망울로 운동장만 쳐다봤다. 운동장에서 축구공 차는 아이들이 행복해 보인다. 쟤네는 발표 준비 안 해도 되겠지. 부럽다.
몇 주 전, 담임선생님이 창체(창의적 체험활동) 수업 때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히어로’를 주제로 발표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하셨다. 번호 순서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마지막 번호인 나는 마음을 놓고 있었다. 경윤이가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내 순서가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뿌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씰룩이며 걸어오던 경윤이가 나를 보고 미간을 확 찌푸렸다. 손에 피자빵이 들린 것을 보니 쟁탈전에서 승리했나 보다.
“너 계속 넋 빠져 있을래?”
“발표가 당장 이번 주인데 어떡해. 준비 하나도 안 했단 말이야.”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구나. 이 언니가 도와줘?”
“진짜?”
반짝이는 눈으로 경윤이를 보니 경윤이가 슬쩍 피자빵과 아이스크림을 내민다. 그리고 계산대를 향해 눈짓한다.
“수강료.”
“그 학원 지금 등록할게요.”
사실 경윤이가 도와준다고 해도 여전히 마음은 편하지 않다. 10톤 정도 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교를 터덜터덜 나왔다. 그에 비해 경윤이는 걸음새가 위풍당당하다.
“걱정하지 마, 다 계획이 있으니까.”
경윤이가 자신만 믿으라는 듯 내 손을 잡고 나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가자, 지식의 창고로.”
경윤아, 역시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못 가. 지식의 창고.”
도서관 언덕을 오를 때 사람은 없고 바람만 휑하니 부는 게 불안하기는 했다만 그게 왜 하필 오늘! 그것도 이번 주냐고요!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게으른 나를 원망하며 한탄하다가 경윤이와 눈이 마주쳤다.
“지현아, 너 발표 언제지?”
“10월 7일.”
경윤이의 동공이 진도 10.0으로 흔들렸다. 경윤이를 안심시키려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어깨를 토닥였다.
“난 괜찮아, 친구야.”
아까까지만 해도 발등에 불이 떨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발등이 재가 됐다.
“다녀왔습니다아~.”
울적했다. 부모님께 힘없이 인사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얼른 와서 밥 먹어.”
그래, 밥은 먹어야지. 곧바로 거실로 나가 식탁 앞에 앉았다. 말없이 밥을 꾸역꾸역 위장 속으로 밀어 넣었다. 엄마 아빠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했다.
“오늘 무슨 일 있었니? 왜 이렇게 풀이 죽어 있어.”
“그러게, 밥 먹는 게 영 시원찮네.”
부모님께 말씀드리기는 조금 창피했지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엄마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셨다. 아빠는 이런 내가 웃긴지 계속 키득키득 웃기만 하셨다.
“그래서 자료 찾으려고 도서관까지 갔더니 도서관이 임시 휴관이었다고?”
“네. 저 완전 큰일 났어요.”
“우리 집에도 서재 있잖아. 책 모으는 네 아빠 덕분에. 거기서 한번 찾아봐.”
엄마의 말에 머릿속 스위치가 켜졌다. 맞다. 아빠는 나와의 추억을 소중히 생각하셔서 내가 어릴 때부터 봐온 책들을 버리지 않고 모두 모아두셨다. 밥을 먹자마자 바로 서재로 달려갔다.
서재에는 책등만 봐도 현기증 나는 백과사전부터 시작해서 장편소설, 산문집, 자기계발서, 외국어, 역사, 과학… 그만 읊도록 하자. 아무튼 여러 종류의 책이 꽂혀 있었다. 한쪽 책장에는 서점의 작은 어린이 코너처럼 내가 어릴 때 즐겨보던 책들이 모여 있다. 홍길동전, 슈퍼맨, 스파이더맨 같은 히어로를 주제로 한 책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한참을 서재에 틀어박혀 자료 찾기에 몰입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좋은 자료는 보이지 않았다. 슬슬 지치고 배 속에 채워둔 음식 배터리들도 방전됐을 때쯤이었다.
띠링-!
휴대폰에서 문자 알림 소리가 울렸다.
- 친구야, 너무 낙담하지 마라. 비록 지식의 창고는 닫혔지만 너의 옆에는 김경윤이 있잖니.^^ 저번에 발표 준비하면서 수집한 자료들 메일로 보내놨으니까 확인해 봐.
- 사랑해요 김경윤! 인간 지식의 창고 김경윤!
내 방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컴퓨터를 켰다. 경윤이가 보낸 메일에는 수많은 인물 자료가 들어 있었다. 아빠가 나의 과제 진행 상태가 궁금했는지 슬쩍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를 함께 보셨다.
“원더우먼 괜찮네.”
“저번 주에 정우가 했어요.”
“토르도 멋지지.”
“그건 주연이가 발표했어요.”
“오! 아이언맨 좋다!”
“아이언맨은 경수가 좋아한대요.”
“아함, 갑자기 왜 이렇게 졸리지. 얼른 자야겠다. 우리 딸 응원한다. 사랑해!”
아빠는 힘내라며 내 어깨를 두어 번 주무르고 나가셨다. 아빠가 급하게 닫고 나간 방문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괜찮다 싶은 자료들은 친구들이 다 발표한 내용이었다. 늦게 발표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파일 하나를 기대 없이 열었다.
▶ 히어로들의 특징
‘어! 이거 괜찮은데?’
꽤 흥미로운 자료였다. 이 내용을 토대로 발표를 준비하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았다. 자료 내용을 메모해 다시 서재로 갔다.
‘한지현, 여기서 모든 것을 끝낸다.’
마음을 굳게 먹고 책장을 뒤적거렸다.
쿵-!
“악!”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