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마이 히어로 下

열정이 너무 과했던 탓일까. 옆에 잘 꽂혀 있던 책이 갑자기 떨어져 내 발등에 꽂혔다.
“아오, 아파라.”
그대로 주저앉아 소리 없이 포효하는 발등을 꽉 쥐고 달랬다. 믿는 책에 발등 찍힌다더니. 아니, 도끼던가, 아무튼. 뾰족한 모서리로 잔인하게 내 발등을 찍은 문제의 책을 째려봤다.

자세히 보니 책이 아니라 낡은 다이어리다. 색이 바랜 갈색 표지가 다이어리를 더 낡아 보이게 했다. 다이어리는 누군가의 글씨로 빼곡했다.

20XX년 X월 X일

우리 공주님이 태어났다.
이름은 한지현. 지혜롭고 어질게 살라는 뜻으로 지었다.
우리 앞으로 우당탕 멋지게 살아보자!

엄마 아빠가 쓴 내 육아 일기였다. 다이어리 앞면을 들추니 크게 ‘한지현 육아 일기’라고 적혀 있다. 엄마 아빠는 이 좋은 걸 놔두고 왜 여태 이야기를 안 했지.
다시 펼쳐 보자니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같고, 내 육아 일기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 괜히 떨렸다. 서재 문틈으로 슬쩍,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부모님을 확인했다. 들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조용히 문을 닫고 조심스럽게 일기장을 펼쳤다.

* 한지현 육아 일기


20XX년 X월 X일

지현이가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다. 남편이 지현이를 빠르게 낚아채서 다행이었다. 아이들은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되는 시한폭탄 같다. 저번에는 지우개를 먹으려는 걸 겨우 막았다. 한지현 육아 난도 급상승.

20XX년 X월 X일

지현이가 본격적으로 걸음마를 시작했다. 출근하기 전에 아내의 도움을 받아 아장아장 걸어와서 안기는데 마음이 울컥했다. 나는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알아서 잘 커주는 것 같아 대견스럽다.

20XX년 X월 X일

지현이가 태어나고 많은 것이 변했다. 가구, 인테리어부터 시작해서 아내와 나의 삶이 모두 지현이에게 맞춰졌다. 내 시간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지현이가 있어서 행복하다.

20XX년 X월 X일

나는 엄마 자격이 없는 걸까. 지현이를 시장에서 잃어버릴 뻔했다. 잠깐 가방에서 지갑을 찾는 사이에 사라졌다. 손발이 벌벌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행히 근처 과일가게에서 주인아주머니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지현이를 발견했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잔뜩 겁에 질린 지현이의 얼굴을 보니 나까지 울면 지현이가 더 무서워할 것 같았다. 그 짧은 순간 느낀 두려움은 너무 끔찍했다.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다.

20XX년 X월 X일

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PD가 학생들과 아빠들에게 각각 이루고 싶은 꿈과 현금 10억 중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을 갖겠냐고 물었다. 학생들은 꿈을 선택했지만, 아빠들은 10억을 택했다. 그 돈으로 가족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테니까. 나도 지현이 아빠로서 그 질문에 답해봤다. 10억을 택할 것 같다. 다큐멘터리에 나온 아빠들과 같은 이유다.

# 디어 마이 히어로 Dear My Hero

“먼저 저에게 자료를 제공해 준 은인 김경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오~.”
반 아이들의 탄성에 경윤이가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두 손을 들고 화답했다.
“저는 경윤이가 준 자료를 토대로 저의 히어로를 찾아보았는데요. 화면을 보실까요?”

“이 세상 어떤 인물이 아무 대가 없이 남을 위해서 살까요? 타인을 위해 목숨까지 걸며 사는 인물이 과연 있을까요? 이렇게까지 남을 위해 희생하면서 그 공을 드러내지 않는 게 가능할까요? 히어로들은 정말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멋진 히어로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면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히어로가 우리 곁에 있으면 얼마나 든든하고 좋을까요?
저는 발표를 준비하면서 우연히 제 부모님이 작성하신 육아 일기를 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히어로들을 보며 가진 생각이 육아 일기를 보면서도 들었습니다. 부모님은 저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셨고, 제가 위험할 때 몸을 사리지 않고 구해주셨습니다. 두렵고 힘든 일도 제 앞에서는 참았고, 그러면서도 ‘내가 이렇게 해줬다’고 절대 생색내지 않으십니다.
히어로는 영화나 드라마, 먼 역사에만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토록 꿈꾸고 바랐던 히어로는 바로 제 옆에 있었던 겁니다. 가정이라는 작은 세계에 부모님이라는 히어로가 계시기 때문에 우리 집은 매일매일이 행복하고 평화롭습니다. 저의 히어로, 여러분의 히어로, 우리의 히어로는 부모님이 아닐까요?”


“다녀왔습니다아!”
목청껏 인사하고, 방에 가방을 얼른 내려놓고 식탁으로 달려갔다.
“우아, 맛있는 김치찜!”
밥을 한 숟갈 크게 떠서 입안에 넣었다.
“좋은 일 있었니?”
“아, 오늘 히어로 발표한다고 하지 않았나?”
“네, 했어요.”
“잘했나 보네. 뭐 했는데?”
엄마 아빠가 나를 또 물끄러미 쳐다봤다. 김치찜의 칼칼함을 헛기침으로 추스르며 눈빛에 답했다.
“음… 되게 진부한데 또 의외로 좀 신선한 히어로요.”
“누구지?”
“아빠는 알아.”
아빠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몰래 준비한다고 했는데 설마….
“홍길동!”
“….”
“아니야?”
“그 있어요. 디어 마이 히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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