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 빈자리

엄마는 신안의 고이도 옆 작은 섬, 일정섬에서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할머니(엄마의 엄마)는 논밭일에 바다 일까지 하며 여섯 자녀 키우기도 힘들어 엄마가 태어난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미안함 때문인지 할머니는 엄마가 네 살이 되도록 모유를 먹이며 엄마를 애틋이 키우셨다. 엄마는 온 가족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초등학교가 있는 고이도와 집이 있는 일정섬 사이에는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노두길’이라고 부르는 그 길을 지나 엄마는 학교까지 1시간씩 걸어 다녔다. 학교 가기 싫은 날은 일부러 늦잠을 자거나 아프다고 칭얼거렸다. 할머니는 엄마를 혼내지 않고 잘 어르고 달래서 학교에 보내셨다.
노두길은 밀물 때가 되면 물에 잠겨버려서 오갈 수 없다. 밀물이 든다 하면 수업 중간에라도 집에 와야 했다. 그날도 밀물 때가 빨라져 여섯째 이모(엄마의 바로 위 언니)와 엄마가 급히 집으로 향했다. 노두길에 왔을 때 이미 물이 무릎까지 찼다. 급히 노두길을 건너 섬에 다다랐을 즈음 그만 이모가 바다에 빠졌다. 물살이 헤엄치는 이모를 멀리 밀어냈다. 그때 산에서 나무하던 할머니가 긴박한 소리를 듣고 달려와 버려진 대나무를 내밀어 이모를 건져내셨다. 엄마는 지금도 물이 찬 노두길에서 온 힘을 다해 이모를 구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머릿속에 생생하다.
저녁이 되면 아궁이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밥 뜸 들이는 냄새가 났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잡아 온 생선을 숯불에 굽고, 가마솥에 밥을 하셨다. 밥이 눌으면 누룽지를 긁어 꼭 엄마에게 주셨다. 할머니가 차려주신 건강식을 먹으며 엄마는 크게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랐다. 엄마는 여전히 그 맛을 그리워한다.
고이도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엄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로 나가 할머니 할아버지와 떨어져 삼촌 이모들과 지내야 했다. 학교 급식이 없던 시절이라 도시락도 직접 쌌는데 늦잠을 잔 날은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해 친구들의 밥을 나눠 먹거나 굶었다. 그럴 때면 부모님과 함께 사는 친구들이 부럽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더욱 그리웠다.
토요일이 되어서야 버스를 타고 집에 갔다. 엄마는 도시에서 맛있게 먹은 것을 꼭 챙겨 가서 할머니께 드렸다. 할머니도 엄마가 좋아하는 과일이 열리면 따지 않고 엄마를 기다렸다가 챙겨주셨다. 주말 내내 엄마가 하는 일이라고는 밭일 나간 할머니 할아버지가 힘들지 않게 집에서 청소하고 밥하는 일이 전부였다. 하지만 엄마는 일주일 중 그날만 기다렸다. 한번은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화가 난 담임 선생님이 종례를 끝내주지 않았다. 버스 시간이 가까워지자 엄마는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 만나러 가야 한다”는 말에 선생님이 종례를 끝내줘서 집에 무사히 갈 수 있었다.
엄마가 중학교 3학년이 됐을 때 할머니의 건강이 안 좋아졌다. 할머니는 섬에서 나와 목포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갈수록 병세가 악화돼 광주에 있는 병원으로 옮기셨다. 병명은 혈액암이었다. 가족들의 신경이 온통 할머니에게 쏠렸다. 할아버지와 큰이모는 광주에 셋방을 얻어 병상에 계신 할머니를 돌보았다. 목포에서 학교생활 하던 엄마와 여섯째 이모도 주말마다 광주로 갔다. 당시 사춘기였던 엄마는 할머니가 아픈 게 싫어 괜히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어느 날, 할머니가 점심 식사를 마치시고 곁에 있던 엄마와 여섯째 이모에게 말씀하셨다.
“엄마 이제 자련다.”
할머니는 그 뒤로 깨어나지 못하셨다. 갑작스러운 이별에 가족들은 많이 울고, 힘들어했다. 한창 사랑이 필요한 시기에 찾아온 할머니의 부재는 엄마에게 큰 상처와 외로움을 남겼다. 엄마는 한동안 혼자 있기를 무서워하며 후유증을 앓았다.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일상을 찾아갔다. 할아버지는 섬으로 돌아가 홀로 농사를 지으셨고, 고등학생이 된 엄마는 주말에 할아버지를 도우러 갔다. 전처럼 주말이 기다려지지는 않았다. 가끔은 힘들다는 핑계로 가지 않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종종 목포에 나오셔서 자식들이 사는 집에 들러 밥을 해놓으셨다.
삼촌과 이모들은 직장에 다니거나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엄마도 사회생활을 하다가 아빠를 만나 결혼했다. 가족들과 각각 떨어져 살았고, 근처에 또래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태어나고 5개월쯤 되었을 때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하나님의 교회 식구를 만났다. 엄마는 그분을 통해 하늘 아버지 어머니를 영접하고 오랫동안 비어 있던 마음 한편을 채워갔다.
현재는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삼촌 이모들은 다시 가까운 거리에 산다. 나이가 들어서도 티격태격하지만 서로를 의지하고 돌본다. 이따금 시골집에 다 같이 모이면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 순수했던 어릴 적 이야기를 꽃피운다.
나는 엄마가 이렇게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을 줄 몰랐다. 엄마도 엄마가 보고 싶을 거라고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우리 남매의 엄마가 된 지금, 엄마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고생하시던 기억만 떠오른다고 한다. 자녀들을 위해 힘들어도 참고 견디시던 모습, 없는 형편에도 자녀들에게 잘해주려고 애쓰시던 모습까지. 그러고는 “나는 엄마(할머니)같이 좋은 엄마가 되려면 더 노력해야 하나 봐”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엄마가 할머니께 받은 사랑을 우리에게 그대로 베풀어주고 있다는 것을. 항상 우리의 모든 잘못을 품어주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는 엄마. 엄마는 이미 우리에게 최고의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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