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방 청소를 하다 어릴 적에 쓰던 크레파스를 발견했습니다. 추억에 잠겨 크레파스 통을 열어보니 크레파스의 키가 제각각이었습니다. 어떤 색은 몽당연필처럼 짧고, 어떤 색은 반으로 부러져 있었습니다. 그중 흰색 크레파스가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다른 크레파스는 다 손때 묻고 낡았는데 흰색 크레파스만 멀쩡했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저는 흰색 크레파스를 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흰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서 굳이 흰색 크레파스를 쓸 일이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흰색 크레파스는 주인에게 잊힌 채 몇 년을 보낸 것입니다.
제 처지가 흰색 크레파스 같았습니다. 잘하는 것, 내세울 것 하나 없어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하고, 결국에는 사람들에게 잊힐 것이라고 낙담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사실 흰색 크레파스는 다양한 곳에 쓰입니다. 검정 도화지나 색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릴 때는 꼭 필요합니다. 흰색 크레파스가 특별해지는 순간은 물방울을 그릴 때입니다. 흰색 크레파스로 물방울에 비친 빛을 표현하고, 그 위에 물감을 칠하면 생생한 물방울이 만들어집니다. 흰색 크레파스만 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런데도 흰색 크레파스가 쓸모없다고 생각했다니….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스스로를 돌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에게도 나만의 색깔이 있다는 것을요. 저는 하나님께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느낀 감정을 글로 쓰는 것을 좋아하고, 떨리지만 사람들 앞에서 발표나 강연을 하면 행복해집니다. 서툴고 실수투성이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는 그 시간만큼은 제 자신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저처럼 ‘잘하는 것이 없어 속상하다’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잘하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각자에게 꼭 맞는 재능을 허락해 주셨고, 우리는 그 재능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속상해하지 말고, 자신감이 떨어질 때면 이렇게 생각하기로 해요.
‘나도 나만의 멋진 색깔을 가지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