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공원 上

나는 흐리게 보이는 시침과 분침을 의심했다. 눈을 비비고 봤지만 시침과 분침은 변함없이 그 자리였다.
8시 40분.
평소라면 무거운 몸을 겨우 끌어 욕실로 갔겠지만 오늘은 그럴 만한 시간이 없다. 재빠르게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 옷걸이에 걸린 교복 와이셔츠를 입으며 욕실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세수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나왔을 때는 코트까지 걸쳐 입고, 한 손에는 목도리를,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신발을 신는데 엄마가 나를 붙잡았다.
“콜록, 밥은 먹고 가야지.”
내가 늦은 걸 모르는 건지, 모른 척하는 건지. 급한 마음에 짜증이 났지만 감기 몸살에 걸린 엄마의 모습에 감정을 추스르고 말했다.
“지금 가도 지각이야.”
“아무리 그래도 아침밥은 챙겨 먹어야 돼.”
엄마는 내 옷을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몸이 휘청거리면서 거의 다 신었던 신발 한 짝이 구석으로 날아갔다. 꾹꾹 눌렀던 짜증이 폭발했다.
“하루쯤 안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엄마의 손을 뿌리쳤다. 아픈 엄마는 내 힘에 못 이겨 뒤로 밀렸다. 깜짝 놀랐지만 죄송하다는 말이 목구멍에서 안 넘어왔다. 어떡해야 할지 머뭇대다가 구석에 있는 신발에 대충 발을 쑤셔 넣고 집에서 뛰쳐나왔다.
골목길을 달리자 찬바람이 세차게 스쳤다. 양 볼이 칼에 베이는 듯하다. 버스에 타서 창밖만 바라봤다.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좀 더 참을걸, 왜 그랬을까. 가슴이 뻐근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선생님한테 혼날 생각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담임 선생님이 조회 시간에 들어오지 않아 지각 문제는 무사히 넘어갔고, 친구들과 떠드는 사이 아침의 아픔은 무뎌져갔다.
하굣길. 입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오다 금세 사라졌다. 학교 정문 앞 거리에는 옷을 두껍게 껴입은 사람들이 오갔다. 꽃샘추위가 제법 무섭다.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봤다. 남청빛이다. 무엇이든지 감춰줄 것만 같은 깊은 색.
“UFO라도 나타났냐?”
철무가 내가 보는 쪽을 바라보며 두리번거렸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검지손가락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응, 저기. 잘 봐봐.”
철무는 심각해진 얼굴로 내가 가리키는 하늘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보일 리가 없는데.
철무는 키도 크고 체격도 크다. 그에 비해 성격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다. 누가 들어도 허풍인 말을 진심으로 믿을 만큼. 반 아이들은 이런 철무를 좋아하면서도 항상 장난을 건다. 순진무구한 반응이 재밌어서다.
하늘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철무를 두고, 슬그머니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아, 또 속았어! 야, 한희찬! 혼자 가냐?”
순진하기는 해도 감각이 둔하지는 않은지, 옆이 허전해진 것을 금방 눈치 챘다. 철무는 달려오더니 점프해서 내 목을 팔로 감았다.
“나 두고 도망가려고 했지?”
“켁, 켁. 항복!”
“다음에는 항복 그런 거 없다.”
내 목에서 팔을 풀어내린 철무는 자기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내 옆을 나란히 걸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대기했다는 듯이 철무가 탈 버스가 진입했다.
“야, 나 먼저 간다. 내일 보자.”
“그려, 어서 들어가게.”
“윽, 그러니까 꼭 우리 할아버지 같아.”
“버스 놓친다. 어여 가.”
철무는 손을 흔들고 버스를 탔다. 버스는 배기관에서 흰 연기를 뿜어 자신의 흔적을 잠시나마 정류장에 남겼다. 곧이어 내가 탈 버스가 왔다. 버스에 올라타서 버스 카드를 찍었다.
삑-
잔액 0원.
청소년 요금이 880원인 걸 생각하면 잔액이 0원만 남기란 쉽지 않은데 신기하다. 빈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꺼내 휴대폰에 연결했다.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하루 종일 피곤했을 눈을 쉬게 해주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띵동. 이번 정류장은 ○○동 주민센터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안내 방송 소리에 잠에서 깼다. 왼쪽 이어폰이 귀에서 떨어져 있다. 이슬이 맺힌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졸아 머리카락이 젖었다. 머리를 털고 창밖을 내다봤다.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다. 어디더라? 아! 급히 하차 버튼을 눌렀다.
버스에서 터덜터덜 내려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기억공원이면 한 정류장 더 온 거네. 다행이지, 뭐.”
기억공원. 누가 붙인 이름인지는 몰라도, 공원의 형태가 한글 자음 ‘ㄱ(기역)’을 닮아서 붙였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정말 그렇다면 그 사람은 엄청 단순한 사람일 것이다.
기억공원 입구가 보였다. 공원 불빛이 밝아 공원을 가로질러 가기로 했다. 상쾌한 풀 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머리도 복잡했는데, 좋다!”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사람, 헤드셋을 끼고 운동하는 사람, 산책을 나온 부부 등 공원에는 사람이 많았다. 좀 더 걸어가자 인공 호수가 나왔다. 꽤 넓었다. 주변에 벤치 하나 외에 별다른 조형물이 없어서 더 넓게 느껴졌다. 이상하게 사람 하나 안 보인다.
호수도 구경하고 잠깐 쉴 겸 벤치에 앉았다. 달빛을 받은 호수가 은은히 빛났다. 눈으로만 담기에는 아쉬워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잘 나왔나?”
사진을 확인하는데 달빛에 반사된 무언가가 찍혔다. 호숫가에 뭐가 있는 건가? 벤치에서 일어나 호숫가로 가까이 다가갔다.
“어?”
여기에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할아버지, 뭐 잃어버리셨어요?”
한 할아버지가 허리를 굽힌 채 뭔가를 찾고 있었다.
“머리핀. 머리핀을 잃어버렸어. 우리 할멈 주려고 산 건데.”
할아버지는 잔디밭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같이 찾아드릴까요?”
“….”
할아버지는 별말이 없었다. 나는 대충 주변을 훑어보았다. 저 멀리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다가가 주워 보니 길쭉한 몸체 끝에 해바라기 모양의 꽃 장식이 달렸고, 꽃 장식 중앙에 투명한 수정이 박힌 머리핀이었다.

“할아버지! 이거 찾으시는 거예요?”
할아버지는 내 손 위에 올려져 있는 핀을 확인하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찾은 거냐?”
“저쪽에 빛나는 게 보여서 갔더니 이게 있더라고요. 달빛이 환해서 금방 찾았나 봐요.”
“고맙구나, 정말 고마워. 뭔가 답례를 하고 싶은데….”
“아니에요, 뭘 이런 걸 가지고. 괜찮아요.”
“저기 벤치에서 좀 기다려보거라.”
“네? 아니 저는….”
말릴 새도 없이 할아버지는 어디론가 향했다. 호숫가 사방이 탁 트였는데도 할아버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벤치에 걸터앉았다.
“아, 빨리 집에 가야 되는데.”
잔잔했던 공기가 한순간 날카로운 찬바람으로 바뀌었다. 얼굴과 두 손이 따가웠다. 아침에 느꼈던 통증이었다. 동시에 잊고 있던 기억이 따끔함을 비집고 떠올랐다. 아픈 엄마를 더 아프게 했던 아침의 기억. 아무렇지 않게 집에 들어가 편하게 쉬려고 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몸을 숙이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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