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에 다니기도 쉽지 않았다. 막냇동생을 돌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동생을 업고 등교했다. 수업을 듣다가 동생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밥을 먹이며 공부와 동생 육아(?)를 병행했다. 농번기에는 집안 살림을 돕느라 한 달간 학교에 가지 못했다. 옷과 신발이 귀해서 명절 때만 부모님이 새 구두를 사주셨는데 구두를 신고 놀러 갔다가 냇물에 떠내려가버린 슬픈 일도 있다.
할아버지는 맏아들인 삼촌만 대학에 보내려 하셨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엄마에게는 바로 공장에 취업하라 하셨지만, 엄마는 회사에 들어가고 싶어서 할아버지의 만류에도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학비는 스스로 벌어야 했다. 방학 때 아르바이트해서 학비를 모으고, 학원에서 자격증 공부까지 했다. 소원대로 중소기업에 취업해서 집에 생활비를 보탰다.
아빠와 결혼한 후 함께 제과점을 운영하다 IMF 경제 위기로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건축 일을 시작하셨고 엄마는 전업주부가 되어 우리를 키웠다.
◆ 아빠 이야기

고모(아빠의 누나) 손잡고 초등학교 입학식에 간 날 처음으로 쫀드기를 먹어봤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맛본 라면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어떤 친구가 ‘예산 촌놈’이라고 놀려서 옥상에서 대판 싸웠다. 그 싸움으로 반 전체가 혼났다. 지금도 반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대학생 때 산악동아리에서 활동했다. 강원도로 산악 등산 MT를 간 날 선배들이 아빠와 아빠 동기들의 가방에는 무거운 짐을 넣고, 자기들 가방에는 침낭 같은 가벼운 짐만 넣어 산을 오르는 내내 엄청 고생했다.
전투경찰로 복무했다. 신병 때 땡볕에서 일하며 피부가 다 타서 고참들이 ‘까마귀’라고 불렀다. 입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이한열 열사(당시 연세대 학생)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이후 대학생들의 시위는 더 거세졌다. 시위대 진압을 원하지 않았지만 상부의 지시대로 움직여야 했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괴롭게 남아 죄책감을 느낀다.
대학교 졸업 후 이형관(구부러지거나 갈라지는 곳이나 서로 다른 관을 잇는 데 쓰는 관)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직장 생활은 고됐다. 상사에게 치이고 매일 반복되는 삶에 무상함을 느낀 아빠는 엄마와 제과점을 열었다. 1997년 IMF 외환 위기가 닥쳤다. 전 국민이 어려움을 겪은 시기에 우리 집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제과점 매출이 줄어 인건비, 월세 등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집에는 배곯는 두 딸(나의 누나들)이 있었다. 아빠는 가장의 책임감을 지고 과감히 제과점을 폐업했다. 당장 생활비를 벌기 위해 넷째 형(나의 큰아버지)을 따라 시작한 건축 일은 지금의 직업이 되었다. 일하며 힘든 순간이 많지만 그때마다 우리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버틴다.
부모님은 원래 강하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살아온 삶을 들어보니 엄마 아빠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 생활이 얼마나 편한 줄도 모르고 불평한 것이 반성된다. 꿋꿋이 삶의 무게를 견뎌온 부모님이 든든히 기댈 수 있는 아들이 되고 싶다. 평생을 말해도 부족하지만, 항상 자식들을 먼저 챙겨주시고 배려해 주시는 엄마 아빠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