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처럼 보드랍고, 바닷가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무언가가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눈입니다. 보미는 창문을 열고 떨어지는 눈을 향해 손을 뻗습니다. 손바닥 위로 사뿐히 내려앉은 눈은 천천히 지켜볼 시간도 주지 않고 사라집니다. 그래도 눈은 자신이 머무른 자리에 차가운 물을 남겼습니다. 손바닥 주름 사이로 스며든 물은,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듯합니다.
일요일 아침, 가족들은 아직 곤히 잡니다. 보미는 창밖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한참 동안 내리던 눈이 그치고 엄마 아빠 오빠가 깨어났습니다. 보미는 오빠와 집 앞 놀이터에 가기로 했습니다. 서둘러 신발을 신고 현관 앞에서 발을 동동 구릅니다.
“빨리 빨리!”
오빠의 겉옷 단추를 채우던 엄마가 웃습니다.
“우리 딸, 그렇게 신나?”
보미가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습니다.
“네! 엄마, 빨리 가고 싶어요!”
“오빠 목도리 다 맬 때까지만 기다려줘.”
“네!”
목도리를 다 맨 오빠에게 엄마가 말합니다.
“보미 손 꼭 잡고, 잘 다녀와.”
보미와 오빠는 놀이터로 갔습니다. 새하얀 놀이터는 그동안 보미가 놀던 놀이터가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밟지 않아 깨끗한 눈 위를 자박자박 걸으며 보미와 오빠는 즐겁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눈을 뭉쳐 오빠는 작은 비행기를, 보미는 귀여운 오리를 만들었습니다.

“보미야, 이제 집에 가자. 너무 추워.”
보미는 계속 눈으로 무언가를 만드느라 오빠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습니다.
“벌써? 이제 눈사람 만들려고 했는데. 조금만 기다려줘.”
오빠가 작게 답합니다.
“알았어.”
눈사람의 몸을 만든 보미가 오빠를 돌아봅니다. 놀이기구 밑에 쪼그려 앉은 오빠가 불쌍해 보여 오빠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집에 가자.”
오빠는 파래진 입술로 웃으며 보미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오빠 몸에 붉은 점들이 생겼습니다. 엄마 아빠의 이야기를 들으니 오빠가 병원에 갈 것 같습니다. 보미는 오빠가 가자고 할 때 빨리 집으로 오지 않아 오빠가 아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빠가 급하게 옷을 챙겨 입습니다. 엄마는 보미를 안아주며 말합니다.
“오빠는 금방 올 거야. 걱정하지 마.”
보미도 오빠를 따라가고 싶은데 자꾸 눈꺼풀이 감깁니다.
금방 온다는 오빠는 하루가 지나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미는 엄마 차를 타고 시골에 왔습니다.
“보미야, 오빠가 많이 아파서 엄마는 오빠 간호하러 병원에 가야 해. 아빠는 계속 일하셔야 하고. 오빠가 나을 때까지 보미는 할머니랑 있는 거야.”
“싫어요!”
보미는 애처롭게 울며 엄마를 붙잡았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단호했습니다.
“보미가 여기서 열 밤만 자고 나면 데리러 올게. 열심히 세고 있어. 딱 열 밤이야.”
“진짜 열 밤이죠?”
“그럼. 할머니 속 안 썩이고 착하게 지낼 수 있지?”
보미는 대답 없이 입술을 앙다물고 울음을 참았습니다. 엄마는 보미 손을 할머니 손에 쥐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보미를 꼭 안아주고는 서둘러 차를 타고 떠났습니다.
보미는 온종일 시무룩했습니다. 밥을 먹어도 맛이 없고, 인형 놀이도 재미가 없습니다. 할머니가 웅크려 앉은 보미 등을 따뜻하게 어루만졌습니다.
“보미야, 괜찮아. 오빠는 곧 나을 거고, 아빠 엄마도 금방 와서 보미를 집으로 데려갈 거야.”
“정말요?”
보미가 울먹거렸습니다.
“그럼. 엄마 아빠랑 오빠가 보미를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데. 딱 열 밤만 할머니랑 맛있는 거 먹으면서 기다리자.”
“네….”
아침이 밝았습니다. 보미가 일어나 옆을 보니 할머니의 잠자리는 반듯이 개어 있었습니다. 보미는 잠이 깼지만 이불 속이 너무 따뜻해서 그대로 누워 눈만 말똥말똥 떴습니다. 시골의 아침은 아주 조용했습니다.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보미는 새들을 보러 방을 나왔습니다.
“보미 벌써 일어났어? 조금만 기다려. 아침밥 차려줄게.”
보미는 아직 할머니가 낯설었지만 할머니의 목소리는 아주 따뜻했습니다. 밥 냄새, 달걀말이 냄새, 생선 굽는 냄새를 맡으며 창밖을 내다봤습니다. 잎이 없는 나무들만 가득하고 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추운 날, 새들이 어디에서 노래하는지 보미는 신기했습니다.
보미는 아침을 먹고 할머니만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할머니는 지붕 밑에 대롱대롱 달린 무언가를 꾹꾹 누르더니 하나를 따서 보미에게 주었습니다.

곶감을 한 입 베어 문 보미의 눈이 커졌습니다. 너무 맛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껄껄 웃으며 작은 소쿠리에 곶감을 여러 개 담았습니다. 보미와 할머니는 마루에 걸터앉아 곶감을 먹었습니다. 보미는 옆에 앉은 할머니를 힐끔힐끔 봤습니다. 할머니 머리는 은빛이 돌아 반짝거렸습니다. 등은 살짝 굽어 엄마보다 작아 보였습니다. 얼굴에는 주름이 많았습니다. 예전에 엄마가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보미야, 할머니 할아버지 들이 왜 주름이 있는지 아니? 할머니 할아버지의 주름은 오랜 시간 많은 경험을 해본 사람들에게만 주는 배지 같은 거야. 예를 들면… 보미는 아직 오빠처럼 받아쓰기 시험 같은 거 안 봤지? 할아버지 할머니 들은 이미 그 시험을 백 번 넘게 본 선생님들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러니까 할아버지 할머니 말씀을 잘 귀담아들어야 해.”
보미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가 대단하게 보였습니다. 할머니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보미의 등을 따뜻하게 쓰다듬었습니다.
“보미야, 눈이 온다는 건 겨울이라는 뜻이야. 꽃이 피면 봄이 왔다는 뜻이고, 매미가 울면 여름이 왔다는 뜻이란다. 그럼 가을이 왔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낙엽이 예쁘게 떨어져요!”
“그렇지!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들은 정해진 때에 꼬박꼬박 우리에게 찾아왔다가 다시 물러가. 보미가 좋아하는 계절도 있고 싫어하는 계절도 있겠지만, 싫어하는 계절이 왔다고 너무 슬퍼하거나 화낼 필요는 없어. 언젠가는 물러가니까. 어떤 것이든 다 그래.”
보미는 할머니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할머니의 목소리가 계속 듣고 싶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네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니?”
“네! ‘봄에 태어난 아이’라고 엄마 아빠가 말해줬어요.”
“잘 아네. 네 할아버지가 고민해서 붙인 이름이지, 예쁜 순우리말이야.”
보미는 자기 이름이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인지 몰랐습니다. 보미가 어릴 적에 하늘로 가신 할아버지가 왠지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빠가 아프고 엄마 아빠와 떨어져 있어야 해서 보미 마음속이 추운 겨울일지 모르겠구나. 그래도 눈이 녹는 건 순식간이야. 곧 따뜻한 봄이 오니까.”
“손바닥에 떨어진 눈이 녹아서 차가운 물을 남기고 가는 것처럼 말이죠?”
보미가 손을 펼쳐 올리며 대답했습니다. 할머니는 깜짝 놀라며 박수를 쳤습니다.
“세상에나, 표현을 아주 잘하는구나. 맞아 맞아, 그런 거지!”
“오빠가 안 아팠으면 좋겠어요. 저 이제 슬퍼하지 않을래요. 오빠가 빨리 낫고, 엄마 아빠가 빨리 오게 여기서 할머니랑 씩씩하게 놀래요.”
할머니는 웃으며 다시 보미 등을 쓸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