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누군가와 같이 있어도 외롭다고 느껴본 사람? 지금 내가 딱 그런 기분이다. ‘친구’라고 부르는 아이들과 함께 있지만 우주에 나 혼자 남겨진 것처럼 막막한 기분…. 세 친구들은 한창 어제 음악 방송에 나온 아이돌 가수에 관해 이야기 중이다. 왜 나만 이렇게 있냐고? 나는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친구들이 좋아하는 남자 아이돌 가수가 방송 인터뷰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오늘 스케줄은 어떻게 되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가끔 어정쩡하게 웃으며 장단을 맞추면서도 언제까지 이렇게 맞장구를 쳐야 할지 한숨이 나온다. 그다음에 이어질 대화 주제를 생각하면 머리가 더 아프다.“너희 오늘 4차원 봤어?”
요즘 유행하는 단발머리에, 교복 치마를 짧게 줄여 입은 지영이가 이제 더 재밌는 이야기의 시작이라는 듯 말꼬를 텄다. 역시나 우리 반 그 아이 이야기였다. 나는 가끔 지영이의 눈빛이 먹이를 앞에 둔 하이에나처럼 보인다.
“크크, 나 아까 아침에 봤지. 화단에서 혼자 이야기하더라.”
“헐, 걔 정말 어떻게 된 거 아니야?”
4차원이라고 불리는 아이는 우리 반 소하다. 말이며 행동이며 정신세계가 이상하다고 이 무리가 정한 별명이다. 애들이 왜 소하를 미워하냐면… 그건 나도 잘 모른다. 내가 1학기에 전학 오기 전부터 이미 소하는 미움의 대상이었다.
나는 아빠의 갑작스러운 지방 발령으로 이곳에 전학 왔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마자 전학 가야 한다고 들었을 때 내 고민은 하나였다. ‘친구 어떻게 사귀지?’ 유달리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꼈기에 친구 한 명 없이 왕따가 될까 봐 많이 걱정했다. 전학 온 날 자기소개 하고 처음으로 맞이한 쉬는 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나는 마치 시공간의 경계 없이 어둠만 가득한 우주 공간을 혼자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은지야, 너 머리 아파?”
그날 생각에 내가 계속 관자놀이를 만졌나 보다. 순식간에 다른 두 명의 시선이 나에게 몰렸다. 나를 걱정해 주는 이 아이는 유진이다. 내가 이 무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친구이자 나의 은인이기도 하다.
전학 온 다음 날 체육 수업이 있었다. 하필 그날 자율적으로 실기 평가를 준비하라고 해서 연습할 애들은 연습하고, 연습하지 않는 애들은 구령대에서 노는 분위기였다. 나는 이미 만들어진 무리에 가서 말을 걸 만큼 숫기 있는 애가 아니었다. 체육복도 없이 교복 차림으로 혼자 떨어져 손가락만 만지작댔다. 아래로 처진 내 시선 안에 갑자기 들어온 사람이 바로 유진이다. 유진이는 내게 처음으로 다가와주고, 자기 무리에 낄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친구다.
이런, 또 나 혼자 생각에 잠겼다. 얼른 애들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티는 안 났나 보다. 처음부터 이야기에 집중한 것처럼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4차원 걔는 치마도 이상하지 않아? 지금이 무슨 우리 엄마 세대도 아니고, 무릎까지 오는 치마 완전 촌스러워.”
이제 소하의 치마 길이도 맘에 안 드나 보다. 소하 치마 이야기를 하면서 지영이가 내 치마도 힐끗 쳐다본 것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2
우리 반에 또 다른 전학생이 왔다. 이름은 공지우. 며칠 동안 안 보는 척 관찰해봤다. 이 아이도 친구 만들기는 어려워 보인다. 초반에는 근처에 있는 애들에게 말도 걸어보고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우리 반 애들은 이미 그룹이 정해져서 친한 그룹 외에 다른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기존 그룹에 새로 한 명 추가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지, 당최 이해가 안 된다. 결국 지우는,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던 소하와 함께 우리 교실 은따가 되어버렸다. 안쓰럽긴 해도 도와주지는 못했다. 자칫하다 내가 지금 무리에서 이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우는 이제 쉬는 시간에 공부를 하거나 잠을 잔다. 의아한 점은 우울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하는 원래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해도 지우는 친구 없는 현실에 슬퍼할 줄 알았는데.숙제를 못 끝내서 아침 일찍 등교했다. 건물 현관에 들어서다 화단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이른 아침에 누군가 하고 이끌리듯 발걸음을 옮겼다. 대화의 주인공은 우리 반 은따, 소하와 지우였다.
“별들아, 잘 자라야 해.”
화단 구석에 꽃씨라도 심었는지 소하는 흙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4차원이다, 이상한 애다 하고 놀리는 것만 듣다가 소하가 직접 말하는 것은 처음 들었다.
“왜 별이라고 불러?”
“코스모스는 별을 품고 있거든. 가을에 꽃이 피면 알 거야.”
화단 앞에 쪼그려 앉아 이야기하는 둘이 이상하기보다는 순수해 보였다. 지우가 물통을 들고 일어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 안녕.”
인사를 해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엉거주춤 오른손을 흔들면서. 친한 사이도 아닌데 손까지 흔들 건 뭐람. 갑자기 너무 창피했다.
“안녕, 은지야! 좋은 아침이야.”
“나도, 나도. 은지 안녕! 좋은 아침이야.”
손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난 소하와 지우의 웃는 얼굴이 화단에 흐드러진 꽃들보다 더 활짝 핀 꽃같이 보인 것은 왜일까.
#3
나는 매일 아침 그 둘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교실에서 대화하는 건 절대 아니다. 은따들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친구들이 보면 난 무리에서 떨어져 나갈 게 뻔하다.금요일 학원 보충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쉴 새 없이 알림이 울리는 단체 채팅방에 들어갔다.

- 4차원 걔는 진짜 학교 어떻게 다니는지 모르겠어ㅋㅋ
- 나였으면 창피해서 진작 전학 갔어
- 걔만 보면 너무 짜증나 확 전학 가게 해줄까?
대화를 더 읽지 않더라도 소하에 대해 얼마나 많은 욕을 해댔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냥 답장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 지영이가 나를 붙잡았다.
- 정은지 너는 왜 말이 없어?
끊임없이 올라오던 대화창에 정적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던 참에 은채와 유진이도 거들었다.
- 맞아 너는 항상 박소하 이야기할 때 잠잠하더라?
-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뭐라고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한 글자 한 글자 타자를 쳤다. 아침마다 인사를 나누고 잠깐씩 이야기를 하면서, 소하는 이상한 아이가 아니라 남들보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에게도 오해를 풀어주고 싶어 앞뒤 재지 않고 내 진심을 적었다.
- 솔직히 나는 박소하에 대해 할 말이 없어. 우리가 아는 것보다 괜찮은 아이일지도 몰라.
대화창에 아까보다 더 긴 정적이 흘렀다. 정적을 깬 건 유진이였다.
- 그래 알았어
그 뒤로 단체 채팅방 알림은 울리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